수마가 할퀴고 간 자리에 가난한 사람들의 절망이 남았다. 한겨울의 추위도 한여름의 더위도 폭우와 폭풍으로 인한 재해도 가난한 사람들에게 유독 가혹하다.서울 강남의 아파트나 강북의 고급주택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 이번 폭우는 외출에 다소 불편함을 주는 정도일 수 있다. 실감이 나지 않으니 수재의연금을 낼 마음의 문이 열리기도 어렵다.
가진 사람들이 마음의 문을 열고 남을 받아 들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는 예수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기보다 어렵다’라고 한 데서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결국 노블리스 오블리주, 즉 가진 사람들이 사회공동체를 위해 솔선수범하여 헌신한다는 것은 깊은 신앙이나 신념, 혹은 오랫동안 축적된 교육과 문화의 힘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
불행히도 우리 사회에서는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찾아보기 어렵다. 한 보수적인 논객은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옛날의 양반문화에 빗대어 체면을 생각하여 함부로 나서지 않는 것이 가진 자들의 의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고작 조선시대 양반행세가 가진 자들의 의무라니, 부자문화치고는 참으로 빈한하기 짝이 없다.
하긴 자신이 가진 돈과 연줄, 혹은 사회적 지위를 이용하여 국민의 기본 의무인 병역과 납세의무마저 외면하는 자들이 소위 사회지도층으로 행세하고 있으니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말하는 것 자체가 한심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게다가 우리 사회의 가진 자들은 패거리를 형성하여 배타적인 울타리를 치고 그 울타리에 들어오지 못하는 자들을 배척하고 폄하한다. 지독한 편견과 근거 없는 우월의식에 사로잡혀 있기도 하다.
학력으로 차별하고 지역으로 차별하고 남녀로 차별하고 아파트 평수로 차별하고 직업으로 차별하고 과거에 어떻게 살았는지로 차별하기 위해 차별을 위한 에피소드들을 끊임없이 유통시킨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기성찰이 없다. 자기성찰이 없으니 ‘남이 하면 불륜이요 내가 하면 로맨스’라는 이중 기준을 적용하여 의무는 생략하고 특권을 챙기면서도 부끄러움이나 거리낌이 전혀 없다.
수재의연금을 내는 것도 그렇다. 수재의연금을 낼 때 어느 기업의 회장 아무개씨가 얼마를 냈다고 발표하지만 사실 그 돈은 기업에서 갹출하는 것으로 모든 주주들과 사원들, 소비자들이 다 함께 내는 돈이다. 기업의 회장은 대주주로서 그 중의 매우 일부분만을 기여했을 뿐 자신의 개인재산으로 성금을 내는 것이 아니다. 부자들이 개인재산으로 성금을 내는 문화가 거의 없다.
또 유한마담들은 자신들의 특별한 소비문화를 업그레이드 시키기 위해 많은 돈과 시간, 관심을 투자한다. 그러나 그들이 그 돈과 시간, 관심의 일부라도 소외된 이웃이나 사회공동체를 위해 할애하는 모습을 보기는 매우 어렵다. 업그레이드 시켜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아서 다른 데 쓸 여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그들은 소비문화를 높일 궁리만 하고 있지, 인격의 수준을 높일 문화는 찾아내지 못한 듯 하다.
선거 때가 되면 가진 자들에게 확실하게 유리한 정책을 취하는 정당에 표를 몰아준다. 서울에서도 부유한 지역은 보수정당이 독점한다. 예전에 대도시에서 야당이 우세하고 농촌에서 군사독재정당이 우세하였던 시절보다 가진 자들의 포용성은 더 후퇴한 듯 하다.
가진 자들이 더 여유가 없다. 그들은 항상 배가 고프다. 히딩크 전감독처럼 더 높은 목표를 위해 더욱 매진하겠다는 의미의 배고픔이 아니라, 더 많은 소유를 위해 더욱 노골적으로 이기적으로 행동하겠다는 의미의 배고픔이다.
사실 필자도 가진 자들의 이러한 천박함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럼에도 가진 자들의 치부를 굳이 드러내는 것은 이제는 가진 자들도 선진국의 지성인들이나 국운이 융성하던 시절의 우리 옛 선조들처럼 인격의 수준을 한 차원 높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지 않으면 비난과 저주의 대상에서 그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시점에 와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다.
박주현 사회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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