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정치권에서는 ‘제왕적 대통령’이라는 말이 유행이다. 대통령 한 사람에게 모든 권한이 집중돼 있음으로 인해 빚어지는 폐단을 지적하는데 거론되는 용어다.‘제왕적 대통령’을 막기위해 이원집정제로 개헌해야 한다는 사람도 있고, 내각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측도 있다. 마치 잘못된 정치현실에 대해 정치인 자신은 잘못이 없고 모두 ‘제왕적 대통령’이라는 제도의 탓으로 돌리고 있다. 정말 ‘제왕적 대통령’이 원죄(原罪)일까?
지난해 김대중 대통령이 민주당 총재직에서 물러났을 때 당시 여권에서는 “제왕적 대통령의 폐단을 막기 위한 결단”이라고 추켜세웠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김 대통령의 총재직 사퇴, 그리고 민주당 탈당은 솔직히 말하면 ‘쫓겨나기 전에 나간 것’일 뿐이다. 바로 5년 전 김영삼씨가 밟았던 전철을 따라가는 것에 대해 그렇게 거창한 의미를 부여할 이유가 있을까.
만일 정말 그 같은 정치적 의미를 생각한 행위였다면 먼저 본인 스스로 ‘제왕적 대통령’으로서 4년 가까이 집권했던 것에 대해 한마디쯤은 해야 했다. 왜냐하면 ‘제왕적 대통령’은 ‘제도’가 아니라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제왕적 대통령’이란 말은 미국에서 먼저 유행했었다. 이미 19세기 무렵부터 한 정파에서 다름 정파에 속한 대통령을 정치적으로 비난할 때 단골로 등장하는 표현이었다.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대통령’(President)을 발명한 것도 미국 사람이다. 이들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면서 ‘왕’(King)을 대신하는 ‘대통령’을 생각해냈고 그 대통령이 무소불위의 권한을 갖는 것을 막기 위해 삼권분립을 엄격히 규정한 헌법을 만들었다. 이 때문에 미국 정치에서는 대통령이 의회나 법원의 권한을 침해할 경우 가장 격렬하게 비난 받는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제왕적 대통령’(Imperial President)라는 말이 생겼다.
하지만 우리의 경우 요즘 유행하는 것처럼 한국의 역대 대통령들을 ‘제왕적대통령’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해방 이후의 정치적 경험에 비춰볼 때 그보다는 ‘독재적 대통령’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것 같다.
특히 현재의 ‘대통령 모델’이 되고 있는 것은 ‘박정희식의 대통령’이다 여러 차례 바뀐 헌법 규정에 관계없이 정치현실에 있어서 삼권분립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고 오직 청와대만 있었을 뿐이다.
집권당의 총潁?겸한 대통령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집권당을 원내 과반수 이상의 의석을 갖도록 함으로써 의회를 지배했다. 또 의회를 통해 대법원장과 대법관을 뽑게 되니 사실상으로 사법부까지 좌지우지 했다. 그리고 청와대에는 비서실이라는 ‘막강한 소(小)내각’을 둠으로써 ‘얼굴 마담’격인 국무총리와 내각을 무력화했다.
박정희 정권이 무너진 이후 집권한 전두환ㆍ노태우 정권이 국가경영 방식을 바꾸지 않고 ‘독재적 대통령’을 이어받은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정권의 ‘주인’은 달라졌지만 속성은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평생을 민주화투쟁으로 보낸 김영삼씨에 이어 김대중 대통령마저도 청와대에 들어간 뒤에는 그 통치방식을 크게 바꾸지 않았다.
정치분야에서도 변화와 개혁을 목소리 높여 외쳤지만, 실제로 대통령으로서 두 사람의 통치방식은 박정희 시절과 별다른 바가 없었다. 어쩌면 독재권력과 싸우는 것과 민주적 정부를 만드는 것과는 원래부터 다른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당권과 대권을 분리한다든지, 국회의장을 국회의원의 손으로 뽑는다든지 하는 최근의 변화는 작지만 바람직한 것이다. 우리 정치에서 ‘독재의 그림자’를 걷어내는 것이야말로 ‘독재적 대통령’의 탄생을 막는 일이다.
그것은 법과 제도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바로 정치인 스스로가 해야 할 일이다. 애당초 ‘독재적 대통령’을 만들어낸 것이 정치인인 만큼, 정치인들이 그 일을 하지 못하면 언젠가는 국민이 바라 잡겠다고 나설 것이다.
신재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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