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 밤 9시께 서울역 S빌딩 앞 쉼터. 젊은이들이 술에 취한 듯 비틀거리는 모습이 곳곳에서 보인다.대학생으로 보이는 배낭을 맨 여성, 회사원인 듯 양복을 차려 입은 남자들 속에 앳된 얼굴까지 무려 20여명. 3~4명은 벤치에 쓰러져 일어날 줄을 모른다.
또 몇몇은 실성한 듯 괴성을 지르다 웃고 주저앉는 동작을 한동안 계속했다. 20분 가량 지나자 빌딩 뒷골목에서 다른 무리 2~3명이 깡충깡충 뛰어 이들에 합류했다. 이들의 환각파티는 자정 넘어까지 계속됐다.
■최근 복용자 2배 증가
본래 용도는 감기치료와 근육 이완 등이지만 각성효과가 높은 ‘환각 알약’(S정, 러미나, 아나렉신(일명 빨간약) 등) 중독자들이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다.
이 알약들은 상습 복용할 경우 부작용이 심각하다. 그러나 가격이 일반 마약의 수십분의 1 수준 이고 뒷골목 판매상 등으로부터 쉽게 구할 수 있어 중독자들이 수도권을 중심으로 속출하고 있다.
경찰은 지난해 이후 중독자가 배 이상 늘어 전국적으로 이미 수만 명이 환각알약에 중독돼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8일 밤, 하반신 장애인인 김모(57ㆍ서울 노원구) 씨는 불편한 몸을 이끌고 역시 서울역 앞에서 ‘환각알약’에 취해 있는 아들 내외를 찾아내 집으로 끌고 왔다.
김씨는 “아들의 환각알약 복용을 며느리가 말리다 함께 빠져들었다”며 “아들이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면서 말라들어가고 있지만 한시도 알약없이는 견디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하소연했다.
■목숨 빼앗는 죽음의 알약
그의 말 처럼 이 약들은 ‘환각의 대가’로 목숨을 요구하기도 한다. 최근 한 중독자가 복용 후 구토증을 일으키다 기도가 막혀 숨졌고, 약에 취한 상태에서 수영을 하다 익사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폐가 녹아 폐결핵으로 숨진 이도 있었다. 몸무게가 8㎏이나 줄어들 정도로 부작용을 겪고 있다는 최모(31ㆍ여)씨는 “주변에는 약값을 구하기 위해 범죄를 저지르는 이들도 있다”며 “복용자 중 50%는 결국 진짜 마약에까지 손을 대고 그때부터는 걷잡을 수 없게 된다”고 말했다.
이 약들은 이처럼 치명적이지만, 값이 싼데다 복용행위는 불법이 아니기 때문에 독버섯 처럼 번져나가고 있다.
이 약들은 종류별로 전문밀매꾼들로부터 1만원만 주면 100알까지 살 수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한번 복용분은 3~4알. 환각 상태가 3~4시간 지속된다.
■복용자 처벌규정 만들어야
물론 이 약들은 의사의 처방전이 필요하기 때문에 시중 약국 등에서는 대량구입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 점을 노려 밀매꾼들이 수도권 2~3곳에 불법으로 약 생산공장을 만들어놓고 전국에 유통시키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단속의 손길은 미치지 못하고 있다.
식품의약품안전청 관계자는 “이 약들은 향정신성의약품이나 마약류가 아닌 오남용 의약품으로 분류돼 있기 때문에 복용자를 처벌할 수 있는 규정이 없다”며 “
중독실태와 심각성을 정확히 파악해 향정신성의약품으로 분류하는 방안을 검토할방침”이라고 말했다.
이진희기자
river@hk.co.kr
강철원기자
str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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