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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 워치]루즈벨트의 휠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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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 워치]루즈벨트의 휠체어

입력
2002.08.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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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국방성 자문기구인 국방정책평의회 세미나에서 사우디 아라비아를 ‘악의 핵’으로 규정한 정책 제안이 나왔다는 보도가 얼마 전 있었다.이 정책 제안은 사우디를 이슬람 원리주의 테러의 최대 후원국으로 지목했다. 이어 테러 세력에 대한 이념적ㆍ재정적 지원을 전면 중단할 것을 최후 통첩하고, 사우디가 따르지 않으면 사우디 유전을 무력 점령할 것을 주장했다.

이런 제안은 사우디가 미국의 공고한 지역 우방인 점에 비춰 난데없다. 그러나 보수우익 진영에서 ‘사우디 점령’ 논의가 확산되고, 부시 행정부에도 지지가 늘고 있다는 얘기는 심상치 않다.

당장은 미국의 이라크 공격에 반대하는 사우디를 압박하려는 것으로 보이지만, 미국의 중동 경략 방식이 바뀌는 조짐으로 볼 수 있다. 그 변화는 그럴듯한 명분을 동원하는 번거로움 마저 피한 채, 적나라한 힘의 행사로 나타날 것임을 예고하는 듯 하다.

50여 년 전 미국이 사우디에 처음 다가간 모습은 달랐다. 2차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5년 2월, 소련 크리미아 반도 얄타에서 스탈린ㆍ 처칠과 종전 이후 국제 질서 분할을 타결한 루스벨트 대통령은 곧장 이집트 수에즈 운하로 날아갔다.

그 곳에는 미 해군 군함을 타고 온 이븐 사우드 사우디 아라비아 국왕이 기다리고 있었다. 첫 외국 나들이를 한 사우드 국왕은 갑갑한 귀빈실을 마다한 채 노천 갑판에 둘러친 천막에 카펫을 깔고 기거했다. 텐트에는 국왕과 수행원들에게 젖과 고기를 제공한 양 떼가 함께 머물렀다.

루스벨트는 사우드를 극진히 배려했다. 그는 체인 스모커였으나 이슬람 교리에 따라 흡연을 죄악시하는 사우드와 한나절 회담하면서 담배 파이프 조차 내보이지 않았다. 식당으로 각기 이동하면서 엘리베이터를 중간에 세워놓고 권련 두 대를 연거푸 피우는 불편을 감수했다.

전상(戰傷)으로 보행이 곤란한 사우드에게 자신의 휠체어 여벌을 선물하는 호의도 보였다. 사우드는 비슷한 나이에 소아마비로 장애까지 닮은 루스벨트를 ‘형제’라 불렀고, 휠체어를 리야드 왕궁으로 가져가 애지중지했다고 한다.

에피소드는 사소한 듯 하지만, 회동의 역사적 의미는 크다. 이 만남으로 최대 석유 매장국 사우디가 미국의 영향권에 편입됐다.

미국은 전후 석유자원 확보 등 중동 경략에 사우디를 축으로 삼았고, 사우디는 이 지역의 옛 지배자 영국과 주변국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에 기댄 것이다. 이해 타산이 앞섰지만, 휠체어 선물이 상징하는 루스벨트의 배려가 적잖이 작용했다.

에피소드는 이어진다. 이 회동에 놀란 처칠은 외무성을 다그쳐 사흘 뒤 이집트 사막 오아시스 호텔에서 사우드 국왕을 만났다. 대세를 뒤집을 가능성은 애초부터 희박했다.

오히려 처칠은 만찬 석상에서 시가를 마구 피워대 사우드를 불쾌하게 했다. 주변의 만류에도 “이슬람은 이슬람이고, 내가 믿는 종교에서 흡연과 음주는 신성한 관례”라고 고집, 제국주의 영국의 오만과 이기주의에 대한 기억과 경계심을 일깨워주었을 뿐이다.

루스벨트가 죽기 두 달 전 거둔 마지막 외교 결실은 미국이 석유가 지탱하는 세계 경제를 지배하는 데 든든한 자산이었다.

이 것이 사우디를 미국의 보호아래 묶어 두어야 하는 당위성의 근원이다. 미국이 쿠웨이트를 침공한 이라크를 걸프전으로 초토화하고 지금껏 목을 죄는 가장 큰 목적도 사우디를 지키고, 그 지배권을 고수하는 데 있다.

‘테러와의 전쟁’을 표방한 미국이 아프간에 이어 이라크와 이란 공격까지 논란하는 근본에 도사린 것은 석유 이권이다.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 저지와 독재 타도를 떠들지만, 논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진정한 지지를 받지는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 사우디 침공까지 거론하는 모습은 처칠의 오만한 처신을 닮았다. 그 것은 곧 도덕적 매력 없는 이기적 제국주의 행보다.

강병태 편집국 부국장

bt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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