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물려준 것은 달랑 캐럴 한 곡. 그러나 노래는 저작권 수입을 낳고, 그 수입은 아들을 백수로 만들었다. 백수 윌(휴 그랜트)은 여자 사귀는 것이 취미이지만 결혼은 질색이다.딸 아이의 대부가 되어 달라는 친구의 요청에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난 자격이 안돼. 난 애 생일도 잊어먹다가 걔가 18세가 되면 술 퍼먹인 다음 데리고 잘거야.” 영화 ‘어바웃 어 보이(About A Boy)’의 주인공은 이런 사람이다.
그는 세상과 인연을 맺기 싫었던 것이다. 누군가를 책임지기도 싫었거나. 잘 생기고, 매너 좋고. 집안은 열대어가 든 어항 벽장식에 DVD며 CD 플레이어 등 최고급 장식품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그는 결정적인 순간에 여자들에게 퇴짜를 맞는다.
“무슨 일 하시나요?” “지금은 놀고 있습니다.” “그럼 그 전에는 뭘 하셨나요?” “그 전에도 놀았는데요. 쭈욱.” 여자들은 돈이 아무리 많아도 빈둥거리며 여자나 밝히는 남자꼴은 참지 못하는 법이다.
그런 그가 ‘아이’와 얽힌 것은 순전히 손 안 대고 코 풀려던 얄팍한 계산 때문이었다. “아이를 데리고 혼자 사는 미혼모들은 처녀들처럼 달라붙지도 않고, 섹스도 화끈하다.” 이런 잔머리를 굴린 것이다.
그래서 독신부모 모임에 나가서 대강 거짓말을 둘러댄 뒤 한 여자를 만나는데, 여자가 데리고 나온 친구의 아들 마커스(니컬러스 호울트)가 매일 그를 찾아오는 것이다. 아이는 툭하면 자살을 기도하는 우울증에 걸린 엄마를 위해, 약간 얼빠진 듯한 윌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미꾸라지 윌이 아이에게서는 쉽게 빠져 나올 수가 없다. 진드기처럼 달라붙는 소년이 귀찮기는 하지만 엄마와 말이 통하지 않는 쓸쓸한 소년은 누군가를 닮아있기 때문이다. 히트곡 하나를 낸 후 술에 쩔어 지내던 아버지와 담을 쌓고 지내던 바로 어린 시절의 자신 말이다.
영화는 남자 여자의 로맨틱하면서도 뻔하디 뻔한 사랑 얘기가 아닌데도 그 어느 로맨틱 코미디보다 입맛을 쩍쩍 당기게 한다. 냉소적인 영국 신사(‘센스 앤 센서빌리티’)나 소심한 서점 주인( ‘노팅 힐’), 어떤 모습으로도 매력적인 휴 그랜트는 조금 더 늘어난 주름을 짧은 머리와 캐주얼 의상으로 커버, 어느 영화에서보다 사랑스런 모습으로 나타났다.
여자 팬들로서는 외면하기 힘든 매력이다. 더불어 학교에서는 왕따를 당하고, 채식주의자 엄마 때문에 햄버거 한 번 먹어보지 못한 냉소적인 12세 소년 마커스는 휴 그랜트의 짝으로 제격이다.
“나는 할리 조엘 오스먼트(‘식스 센스’의 주인공)가 아니라 학교에 다닌다”며 냉소적인 대사를 적시에 날리는 호울트는 오스먼트를 능가하는 연기력의 소유자.
영화는 다양한 캐릭터를 통해 ‘섬’에 갇혀 사는 이들을 드러낸다. 관계를 맺는 것이 싫어 독신으로 살려는 이기주의자와 남의 취향을 고려하지 않는 채식주의자, 남자들이라면 이를 가는 미혼모(모임의 주인공은 대부분 여자들) 등 자신의 처지에서만 세상을 보내는 이들에게 한 번쯤 남과 감정을 공유해보라고 권한다.
윌이 매력적인 다른 여성과 ‘드디어’ 사랑에 빠진 후에도 마커스 모자와 단란한 한때를 보내는 설정 역시 주인공을 짝지우지 않으면 못배기는 할리우드 영화에서는 감히 엄두도 못 낼 상큼한 결말이다.
엄마의 취향을 강제로 물려받은 마커스가 힙합 경연장 같은 학예회에서 청승맞기 짝이 없는 ‘Killing Me Softly’를 반주도 없이 부르는 것을 참다 못한 휴 그랜트가 전자기타를 메고 노래를 부르는 장면은 그의 팬을 위한 설정? ‘아메리칸 파이’의 폴, 크리스 웨에츠 형제가 닉 혼비의 인기 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었다. 23일 개봉. 12세 관람가.
박은주기자 jup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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