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들이 활약하던 시대로부터 인류의 시대로 들어서면 성군들이 통치하는 태평성대가 출현한다. 중국에서 이 시대는 요(堯) 순(舜) 우(禹) 탕(湯) 문왕(文王) 무왕(武王) 주공(周公)으로 이어지는 여섯 명의 임금이 다스렸다고 한다.이중에서도 특히 요순 시대는 후세에 태평성대를 상징하는 용어가 될 정도로 대표적이다. 이들 성군은 완전한 신은 아니지만 영웅과 마찬가지로 반신반인적인 성격을 띠는 비범한 존재이다.
요의 출생이나 성장 과정에 대해서는 잘 알려진 바가 없다. 여러 고서에 의하면 그는 당(唐)이라는 지역에 나라를 정했고 성이 도당씨(陶唐氏)라고 했다 한다.
우리는 요(堯)라는 그의 이름과 성이 흙이라던가 도기(陶器)와 관련된 것으로 보아 그가 신석기 시대 토기 제작상의 저명한 인물로 신격화한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볼 수 있다. 신석기 시대에는 토기 제작이 무척 중요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요는 훌륭한 자질을 지닌 임금이었다. 그는 임금이 되었어도 아주 검소하게 살았다. 전국(戰國)시대에 법가(法家) 사상가인 한비(韓非)가 쓴 ‘한비자(韓非子)’에 따르면 그는 겨울에는 사슴가죽옷을, 여름에는 삼베옷을 입었고 집은 띠풀과 통나무로 지었으며, 식사는 거친 야채국으로 만족했다 한다.
그래서 문지기라도 이보다는 더 잘 살았을 것이라는 말이 나왔을 정도였다 한다. 요는 마음에서도 진정 백성들을 위하고 염려했다.
한(漢) 나라 때 유향(劉向)이 지은 ‘설원(說苑)’에 의하면 그는 어떤 사람이 배가 고프다 하면 “ 내가 그의 배를 곯게 하였구나”하고 또 어떤 사람이 춥다 하면 “내가 그를 춥게 하였구나”하며 어떤 사람이 죄를 지으면 “내가 그를 죄에 빠뜨렸구나”하였다 한다.
요가 얼마나 자기를 돌보지 않았는가를 말해주는 또 하나의 일화가 있다. 그 당시 악전이라는 유명한 신선이 있었다. 그는 요가 국사에 전념하느라 몸이 쇠약해진 것을 염려하여 산에서 딴 좋은 잣을 요에게 먹으라고 선물하였다.
그러나 요는 너무 바빠서 그것을 먹을 시간조차 없었다. 그런데 그 잣을 먹었던 다른 사람들은 모두 이삼백세까지 살았다 한다.
요를 보좌했던 신하들도 모두 뛰어나서 태평성대를 이룩하는 데에 기여했다. ‘설원’에 의하면 후일 그를 계승하여 마찬가지로 성군이 된 순은 사도(司徒)로서 교육 일을 맡았고, 설(契)은 사마(司馬)로서 군사 일을 맡았고, 나중에 주(周) 나라의 시조가 된 후직(后稷)은 전주(田疇)로서 농사 일을 맡았고, 기(夔)는 악정(樂正)으로서 음악 일을 맡았고, 수는 공사(工師)로서 기술 일을 맡았고. 고요(皐陶)는 대리(大理)로서 재판 일을 맡았다고 한다.
요 임금의 시대는 모든 일들이 순조롭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갑자기 열 개의 해가 동시에 떠올라서 혹독한 가뭄에 시달린 적도 있었고(이 때는 명궁 예가 아홉 개의 해를 격추시켜 위기를 모면했다) 20여년간 홍수가 계속되어 생존이 위협을 받은 적도 있었다(이 때엔 곤과 우의 치수에 의해 진정되었다) 그러나 앞서 말한 요의 훌륭한 덕성과 명신들의 노력에 의해 이 모든 난관들을 극복하고 마침내 태평성대를 이룩할 수 있었다.
양(梁) 나라 때 임방(任昉)이 지은 ‘술이기(述異記)’에 의하면 나라가 잘 다스려지자 여러 가지 상서로운 징조들이 요의 궁전에서 나타났다고 한다.
가령 말에게 먹이려던 꼴이 싱그러운 벼로 변했는가 하면, 봉황새가 뜨락에 내려오고, 삽포( 浦)라는 이상한 풀이 주방에 나서 한 여름에도 서늘하여 음식이 상하지 않기도 하였다.
‘습유기’라는 책에는 또 지지국( 支國)이라는 나라에서 바쳤다는 중명조(重明鳥)라는 새에 관한 기록이 있다. 이 새는 한쪽 눈에 눈동자가 둘이었으며 닭처럼 생겼고 봉황새의 울음소리를 냈다.
이 새는 맹수도 물리치고 사악한 모든 것으로부터 보호해주는 힘이 있었다. 그런데 이 새는 중국에 머무르지 않고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가 가끔 오곤 했다.
사람들은 이 신통한 새가 자기 집에 오길 고대하였는데 새가 안 오면 이 새의 모습을 나무나 쇠로 새겨 문앞에 걸어두어도 도깨비나 귀신 따위를 물리칠 수 있었다 한다.
고대 중국에는 인간의 일과 하늘의 도리 곧 자연이 합치된다는 관념이 있었다. 이를 천인합일관(天人合一觀)이라고 부르는데 여기에서 임금이 정치를 하면 그 잘잘못에 따라 반드시 자연의 징조가 나타난다는 생각이 일어났다.
예컨대 정치가 잘 이루어지면 하늘이 봉황새와 같은 신성한 동물을 보내 그 표징을 드러내고 정치가 어지러우면 산이 무너진다든가 하는 천재지변으로 하늘이 경고를 한다는 식이다.
이것을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이라고 한다. 이 천인감응설은 한 나라 때에 크게 유행하였다. 요가 정치를 잘 하니 여러 신비한 자연현상이 나타났다고 하는 이야기들은 정작 ‘산해경(山海經)’과 같은 신화서에서 보이지 않고 모두 한 나라 이후에 지어진 책들에서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우리는 이러한 이야기들이 후세에 천인감응설적 관념에 의해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요는 백성들이 자신의 다스림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어졌다. 그래서 어느날 궁궐을 나와 길을 거닐었다. 그런데 팔십살 쯤 된 노인이 길가에 앉아 막대기로 땅을 두드리며(일설에는 고대의 비석치기 비슷한 놀이라고도 한다)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닌가?
“아침에 나가 일하고 저녁에 들어와 쉬네. 우물 파서 물 마시고 밭 갈아 밥 먹으니 임금님 덕이라고는 하나도 없네.” 요는 이 노래를 듣고 화를 낸 것이 아니라 만족했다.
왜냐하면 임금의 존재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백성들에게 전혀 부담을 주지 않는 다스림이야 말로 최상의 다스림이기 때문이다. 노인이 불렀던 노래를 ‘격양가(擊壤歌)’라고 하는데 이후 태평성대를 상징하는 어휘가 되었다.
즉위한 지 수십년이 흐르자 요는 왕위를 적합한 사람에게 물려주고 싶었다. 그런데 아들 단주(丹朱)는 성품이 거칠고 못되었다. 요는 인재를 물색하다가 허유(許由)라는 사람이 어질다는 추천을 받고 그를 찾았다.
한편 허유는 요가 자기를 불러 왕위를 주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몸을 피하여 기산(箕山)이라는 곳으로 가서 살았다. 요는 다시 기산으로 사람을 보내 허유에게 우선 재상이라도 맡아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 요청을 완강히 거절하고 허유는 집 근처를 흐르는 영수(潁水)라는 강물에 나아가 귀를 씻었다. 그 때 마침 친구 소부(巢父)가 물을 먹이려고 소떼를 끌고 왔다가 이 광경을 보고 왜 귀를 씻는지 물었다.
허유는 이렇게 말했다. “요가 나더러 재상이 되라 하네. 이런 더러운 소리를 들었기에 귀를 씻는 것이라네.” 이 말에 소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이 조용히 살았으면 어찌 이런 꼴을 당했겠나. 내 소가 먹을 물이 더러워졌겠네.” 그리고는 소를 끌고 상류로 가서 물을 먹였다. 결국 요는 허유에게 왕위를 전할 것을 포기하고 후일 순에게 물려주게 된다.
요의 이야기는 중국의 초기 역사시대의 정치상황을 시사한다. 그것은 아직 가부장적인 왕권국가가 성립되기 이전의 모습으로 집단에서 지도자를 합의에 의해 선출하는 방식이 일반적이었던 현실을 반영한다.
이것은 후세에 유학자들에 의해 선양(禪讓)이라는 왕위 계승방식으로 찬양된다. 아울러 요의 다스림과 관련한 신비한 징조라던가, 격양가, 허유 이야기 등은 후세에 지어진 혐의가 강하다.
요 순 우 탕 등의 초기 제왕들은 후세에 특히 한 나라 때에 유교가 국교로 제정되면서 유교에서 표방하는 이상국가의 개념에 맞춰져 윤색되는데 이 과정에서 앞서의 이야기들이 창작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요와 관련된 대부분의 이야기들은 유교주의자들의 이상적인 군주, 이상적인 사회에 대한 꿈이 빚어낸 산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 요 임금때 시간관념 등장
요 임금때 일어난 신비로은 일로는 명협(蓂협)이라는 풀이 섬돌에 난 것도 들 수 있다. 이 풀은 매달 초하루부터 깍지가 하나씩 생기기 시작하여 보름날까지 열다섯 개에 이르렀다가 다시 열 엿새부터는 하나씩 떨어져 월말이 되면 모두 떨어져 버렸다. 요는 이 풀의 깍지 수를 보고 날짜를 알 수 있어 이 풀은 달력 구실을 하였다. 그래서 이 풀을 역초(曆草)라고 부르기도 한다.
또 전진(前秦)의 왕가(王嘉)가 지은 ‘습유기(拾遺記)’에 의하면 요 임금 때 서해 바다에 밤이면 빛을 발하는 큰 뗏목이 나타났는데 사해를 떠돌다가 12년만에 한바퀴를 다 돌고 오곤 했다 한다. 사람들은 이 뗏목을 관월사(貫月査)라고 이름지었으니 이 배를 통해 세월의 한 주기(고대에는 12년이었다)가 흘러간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일화를 통해 고대 중국인들이 요부터는 인간의 역사가 시작된 것으로 생각한 것을 알 수 있다. 시간을 헤아릴 필요가 있는 시대, 그것은 더 이상 불사의 신들이 활약하던 신화의 시대가 아니고 유한한 생명을 지닌 인간의 시대인 것이다.
/글 정재서 이화여대 중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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