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미군 당국은 7일 미군 장갑차의 여중생 압사사건에 대한 우리 정부의 1차적 형사재판 관할권 포기 요청을 거부하였다. 공무 중 사고에 대해 미군 당국이 재판권을 포기하는 전례를 만들 수 없다는 것이다.미군 당국은 서둘러 사건 재발 방지를 위한 안전대책을 내놓았으나 문제가 해결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정치권까지도 미군 당국의 재고를 요구하였다. 이 사건은 이제 21세기에 들어선 한미관계의 실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실례가 되었다.
미군 당국은 우리의 요구에 대해 “1957년 일본에서 발생한 소위 ‘지라드 사건’은 미일 주둔군지위협정(SOFA) 협의 전에 일어난 의도적인 범죄행위로 이 사건과 달라 재판권 포기의 전례가 아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사실은 당시 미국이 지라드 사건을 ‘공무 중 사고’라면서 1차적 재판권을 주장하였다가 일본의 거센 반발에 부딪히자 1953년 발효된 미일 주둔군지위협정의 재판권 포기 조항에 따라, 아이젠하워 당시 미국 대통령의 확인 아래 재판권을 포기하였다.
미 연방대법원도 이 조항에 따른 미국의 재판권 포기는 적법하다고 인정하였다. 그런데 그로부터 45년이 지난 지금, 한국에서 미국은 비로소 지라드 사건이 ‘의도적인 범죄행위’였다고 입장을 바꾸었다. 오로지 이번 여중생 압사사건의 범인들이 한국 법정에 서지 않도록 하기 위한 구실 찾기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는 입장 변화이다.
여중생 압사사건이 계속 확대되는 가장 큰 이유는 미군 당국 스스로 진실을 밝히지 않기 때문이다. 검찰은 사건의 주 원인이 통신장비불량으로 인한 통신장애이며, 미군 당국의 수사에서도 이 점이 중점적으로 다루어졌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미군 당국은 그간 ‘무선교신혼선’ 등을 거론하였을 뿐, 단 한 번도 ‘통신장비불량’을 언급한 일이 없다.
검찰수사 결과가 미군수사 결과와 일치한다는 미군 당국의 뒤늦은 언급은 명백히 사실에 어긋나는 것이다. 미군 당국이 왜 진작에 이 점을 밝히지 않았는지에 대한 유족과 국민의 의문에 성실히 답하지 않고서는 사태를 무마하려 한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다.
이번 사건에서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미군범죄자를 미군에 인도하기에 급급하고, 공무 중 범죄라면 아예 수사도 하지 않는 우리 수사기관의 관행과 이를 만든 불합리한 한미 주둔군지위협정(SOFA)이다.
사건발생 직후부터 철저한 수사가 이루어졌으면 진작에 진실이 드러나고 논란은 종결되었을 것이다. 미군의 비협조로 미궁에 빠진 ‘서정만씨 살해사건’과 재판도 열지 못한 ‘맥팔랜드 사건’, 이 모두 한미 주둔군지위협정 규정상 구체적인 수사 및 재판 협조 규정이 마련되지 않은 결과이다.
한미 양국은 수사기관의 충분한 수사와 원활한 재판 진행을 위하여 시급히 근거규정을 마련하여야 한다.
현행 한미 주둔군지위협정 규정상 살인이나 강간이 아니면 미군 피의자를 구금 수사할 수도 없어 한국인 피해자는 오만한 미군 범죄자로부터 보상 받을 길조차 막막하다.
대한민국에만 적용된 호의적 재판권포기조항은 미군 범죄자들에게는 그야말로 특혜였다. 미군의 위신에 합당하지 않으면 재판을 거부할 수 있다거나 미국 정부대표가 참여하지 않을 경우 피의자의 진술은 증거능력이 없다는 조항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 대한민국의 사법 주권에 대한 유린이다.
상호신뢰에 기반한 우호적 한미관계를 위해서는 미군 범죄자에게 특혜를 주고 우리 국민이 일방적으로 피해를 감내해 왔던 불평등한 상황을 바꾸어야 한다.
미군 당국이 진정으로 유족들을 위로하려면, 이제라도 재판권을 포기하고 진상을 밝히기를 바란다. 우리 정부 역시 이번 사건을 한미 관계발전의 계기로 삼아 양국간 주둔군지위협정의 불평등 조항을 전면 개정하고, 더 이상의 피해가 없도록 만반의 조치를 취하여야 한다.
이정희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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