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8월12일 미국 작곡가 존 케이지가 80세로 작고했다. 케이지를 흔히 작곡가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그의 예술을 딱히 음악이라고 칸막이해서 말하기는 어렵다.그의 영향 아래서 전위적 예술 활동을 수행한 요제프 보이스나 백남준(白南準)이 그랬듯, 케이지도 예술 장르 사이의 전통적 벽을 허물며 현대 예술의 총체적 모습을 크게 경신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케이지에게는 작곡가나 음악가라는 이름보다 ‘예술가’라는 막연한 이름이 더 어울린다.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난 케이지는 포모나 대학을 졸업하고 헨리 딕슨 카우엘과 아르놀트 쇤베르크 같은 ‘비(非)전통적’ 음악가들로부터 작곡을 배웠다.
케이지는 뒷날 카우엘에 대해 “역사상 처음으로 피아노를 주먹으로 치거나 팔뚝으로 건반을 두드리거나 피아노 내부의 줄을 손으로 뜯으며 연주를 한 음악가”라고 회상한 바 있는데, 스승의 이런 전위성은 케이지의 예술에도 깊은 흔적을 남겼다.
케이지의 이름이 전세계에 알려진 것은 1952년 독일에서 열린 현대음악제에서 ‘4분33초’라는 작품을 발표하고나서였다.
4분33초 동안 아무 연주도 하지 않은 채 공연장에 모인 청중들의 소음을 채집하는 것으로 끝난 이 ‘연주회’는 행위예술과 전자음악 양쪽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4분33초’는 이른바 ‘해프닝’의 선구적 사례로서 1962년에 결성된 행위 예술 단체 ‘플럭서스’에 예술방법론적 밑자리를 제공했다.
이 작품은 또 음악에 우연성이나 불확실성이라는 요소를 도입함으로써, 그 뒤 카를하인츠 슈토크하우젠이 확립할 전자음악의 생연주(生演奏) 기법에 결정적 아이디어를 건넸다.
케이지 이전에 전자음악은 녹음테이프에 정착된 ‘정지된 음악’이었지만, 케이지 이후 그것은 즉흥성과 전자적 변조를 중시하는 ‘움직이는 음악’이 되었다.
고종석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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