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60년대의 대학생들은 쇼펜하우어나 니체의 철학에 관해 싸구려 막걸리집에 눌러 앉아 열띤 토론 벌이기를 좋아했다. 지금처럼 첨단 과학이나 경제 그리고 정치보다는 대학생이라면 ‘어려운 철학’을 어느 정도는 알아야 했다.우리말 번역본에 ‘행복의 철학’이라는 제목이 붙었던 버트런드 러셀의 저서 ‘행복의 정복’을 읽었을 때, 영문과 대학생이었던 필자는 처음에 무슨 이런 철학도 있나 싶었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처럼 우아하지도 않고,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처럼 난해하지도 않았으며, 키에르케고르처럼 심오하지도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계속 읽어내려가는 동안 러셀의 행복 철학도 역시 철학이라는 납득이 갔으며 인간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쉽고도 평이하게 가르쳐주는 이런 책이야말로 어쩌면 참된 삶의 지침서일지 모른다고 믿게 되었다.
크리슈나무르티나 라즈니쉬 같은 인도 영상가들이 무소유와 행복을 얘기하는 책이 우리나라에 알려지지 않았던 시절, “아무리 철봉을 좋아하더라도 날이면 날마다 철봉만 해서는 행복해지기가 불가능하다”는 지극히 간단한 철학은 마치 허를 찔린 기분을 느끼게 만들었다.
그것은 훗날 방콕의 잠롱 시장이 실천한 ‘인생철학’과 사뭇 비슷했다. 그리고 ‘심심하다’는 말 대신 ‘고독하다’는 어휘를 꼭 사용해야만 문학이나 철학이 되지는 않는다는 가르침을 준 ‘행복의 정복’은 책 읽기뿐 아니라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서도 새로운 눈을 뜨게 했다.
러셀의 행복 철학은 어느 정도 불교적인 성향을 띤다. 꼭 최고이거나 1등이어야만 행복하지는 않다는 진리, 그것은 비싸고 맛있는 음식을 먹어야만 마음의 부자가 되지는 않는다는 지극히 단순한 가르침과 같다.
내가 나이 마흔을 맞았을 때, 이제부터는 억지로 돈을 벌려 하지 말자는 결심을 했던 까닭은 아마도 내게 돈이 많았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이란 하루 세끼 이상은 밥을 먹어야 할 필요가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내가 환갑을 맞았을 때, 내 인생 최고의 작품을 앞으로 쓰겠다는 욕심을 버린 까닭 역시 러셀의 가르침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어쩌면 내 생애 최고의 작품은 이미 썼는지도 모르고 세계 최고의 작품을 쓰겠다는 과욕은 날이면 날마다 철봉만 하는 삶의 어리석음인지도 모르겠다.
/안정훈 소설가·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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