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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 이만섭(11)3선개헌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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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 이만섭(11)3선개헌⑦

입력
2002.08.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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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안 일이지만 중앙정보부는 이날의 영빈관 의원총회를 모두 도청하고 있었다. 처음에 우린 이런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때문에 내 발언이 김형욱(金炯旭) 중앙정보부장의 귀에 곧바로 들어간 것은 불문가지였다.내 발언에 흥분한 김형욱 부장은 곧장 이후락(李厚洛) 비서실장실로 찾아 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만섭이가 우리를 쫓아 내려고 한다. 내가 이만섭이를 죽여 버리겠어. 이럴 줄 알았으면 김성곤(金成坤)이도 미리 잡아 넣을 걸 그랬어.”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김형욱 부장과 김성곤의원은 의원총회 며칠 전 무슨 일인가로 심하게 다투었다고 한다. 때문에 내 발언을 놓고 김형욱 부장은 김성곤 의원과 내가 사전에 의논한 것으로 의심했던 것이다.

집에서 죽을 먹고 있던 김성곤 의원은 청와대 비서실의 한 직원으로부터 이를 전해 듣고 부리나케 의원총회장으로 달려 왔다. “지금 우리는 이후락 김형욱 두 사람의 퇴진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김형욱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날 잡아넣으려 하고 있소.”

이 말에 의원들은 흥분하기 시작했다. 나는 사태가 막다른 길로 치닫고 있음을 느꼈다. 이제는 정말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다시 발언대에 섰다.

“김형욱과 이후락을 이 자리에 불러 냅시다. 불러 내서 사표를 받읍시다. 김형욱이 기관총을 갖고 오든 권총을 들고 오든 아무튼 결판을 내야 합니다.”

두 사람에 대한 성토로 회의장이 들끓고 있을 때 장경순(張坰淳) 국회부의장이 돌아왔다. “대통령께서는 ‘모든 것을 이해한다, 그러니 그 문제는 내게 맡기고 개헌안에 서명해 줬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번에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생각합니다.”

의원들의 흥분은 그제서야 가라앉았다. 그러나 나는 확실하게 해 두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대통령에게 맡기는 것은 찬성합니다. 그러나 1주일 후 반드시 다시 의원총회를 열어야 합니다. 그때까지 대통령께서 두 사람을 조치해야 합니다.” 나의 제안을 모든 의원들이 지지해 마침내 의원총회가 끝났다. 30일 새벽 4시40분, 18시간 동안의 의원총회였다.

나는 집으로 향하면서 불안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김형욱 부장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를 일이었다. 우리 집 앞의 어둑한 골목길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사람이 숨어 있기에 딱 좋은 곳이었다. 순간 두려움이 엄습했다. 집으로 가기 위해 서대문 로터리 쪽으로 가려다가 방향을 바꿔 미아리 친척 동생 집으로 향했다. 친척 동생 집에 누웠지만 잠이 올 턱이 없었다.

날이 완전히 밝은 뒤 집에 연락해 보니 청와대에서 날 찾고 있다는 게 아닌가. 내가 내건 선행 조건에 대해 대통령이 직접 들어 보려는 것 같았다. 그날 오후 3시 청와대에 들어가 상세히 내 뜻을 설명했다.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은 나를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이 의원의 순수한 마음은 이해가 가는데 김성곤 의원은 그게 뭐야.” 김성곤 의원까지 이후락 김형욱 퇴진에 동조한 게 박 대통령으로서는 여간 못마땅한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저녁에 다시 청와대로 들어 오라는 연락이 왔다. 이후락 실장, 김형욱 부장, 김성곤 의원이 와 있었다. 서로 감정이 나빠진 네 사람을 화해시키기 위해 박 대통령이 자리를 마련한 것이었다.

내가 김형욱 부장에게 악수를 청하자 그는 손은 내밀지 않고 소리부터 질렀다. “야, 이 의원. 너 나한테 이러기야!” 순간 화가 치밀었다. “뭐야! 너, 각하 앞이라고 큰 소리 치는 거야. 네가 할 일은 당장 그만두는 것 밖에 없어. 이게 어디다 대고 큰 소리야!”

고성이 오갔지만 박 대통령은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박 대통령이 주선한 화해가 실패로 끝난 것이다.

7대 국회 때 박정희 대통령을 수행해 태국을 방문, 푸미폰 국왕과 악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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