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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21) 소설가 김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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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21) 소설가 김원일

입력
2002.08.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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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약 문학의 길로 나서지 않았다면 60 나이에 접어든 지금 나는 무엇이 되어 있을까? 얼른 떠오르는 게, 화가다.초등학교 시절부터 그림 솜씨가 좀 있었기에 어쩜 이발관 그림 수준의 화가 정도는 되었을는지 모르겠다.

아니, 가난 때문에 화가의 꿈을 고등학교 때 접었으므로 한 직장에서 18년을 근무했듯, 평범한 직장인으로 늙어 지금쯤 명퇴나 정년퇴직 끝에 노년의 길로 들어섰을 것이다.

학창 시절을 회고해 보건대 수학, 외국어, 암기력은 먹통인 대신 예술적 감수성은 조금 있었기에 사회에 나온 뒤 문학류의 독서, 화집 들치기, 고전음악 듣기는 여기 삼아 즐겼으리라.

지금 피카소의 삶과 그의 그림에 관해 책을 쓰고 있기에, 어쩌면 새로운 분야로 이름지어진 문화비평가가 되었을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25세로 소설을 써서 문단에 발을 들여놓았다. 문학에 뜻을 둔 10대 후반부터 햇수로 따지자면 40년 넘게 열심히 한 우물을 판 셈이다. 그 동안 쓴 소설이 권수로 따져 30권이 넘으니 적은 분량은 아니다.

돌아보건대 내 딴에는 판매 쪽에 한눈 팔지 않고 부지런히 쓴 양에 비추어, 이룬 문학적 성과는 대수롭지 않게 여겨진다.

내가 내 소설의 평점을 내릴 때 객관적일 수 없지만 남들 앞에 “이 작품 정도는 어때?”하고 자만에 차서 내놓을만한 소설이 없으니 그렇다는 말이다.

부족한 공부, 모자라는 재능, 솜씨 없는 문장력을 보충하느라 쓰기에 쉬지 않고 열성을 다했다는 자부심은 갖고 있다.

의지력 부족에 기인하지만 문학을 한답시고 아직도 말술을 마다 않고 하루 담배 3갑을 피우는 골초이나 40여 년 내 의치처가 되어온 즐거운 습관조차 버려가며 명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오만을 순치 못한 불찰 탓도 있으리라. 그러나 타고난 건강으로 여기까지는 별 탈 없이 지탱해왔다.

내 연령층은 8ㆍ15 해방을 기억하지 못하고 소년 시절에 민족 상잔의 전쟁을 겪었다. 농촌 인구가 80%에 달했던 농경시대에 모두가 힘겹게 춘궁기를 넘겼다 보니 가난을 절실히 체험하며 성장했고, 둘러보면 주변의 작가들 중에는 의외로 결손가정 출신이 많다.

그런 헐벗은 경험은 다른 무엇보다 글로 쓰기에 알맞으므로 그들 역시 청년기를 맞은 1960년대 이후 쉽게 문학의 길로 접어들었을 것이다.

문학가가 되는 길은 재력, 인맥, 학력에 구애받지 않고 누구로부터의 배움이 필요 없는 분야이다. 대본집에서 빌려볼 망정 책이 길잡이요 공책과 필기구만 있으면 자신이 살아온 삶의 한 자락에 문학적 장치를 섞어 억하심정을 풀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경상남도 소읍 장터거리에서 일정한 생업 없이 어영부영 살림을 꾸려갔던 식구 단출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지금 따져보면, 독자였던 아버지는 내가 태어날 때부터 낭만적이고 열정적인 코뮤니스트였다. 어머니와의 불화까지 겹쳐 아버지는 집에 붙어 있는 날이 거의 없었고, 집안 분위기는 늘 폐가처럼 음습하게 고즈넉했다.

아버지의 지하 암약에 따라 1948년 가족이 서울로 이주했으나 2년 뒤 전쟁을 만나 아버지는 단신 월북하고 남은 가족은 피난을 내려와 낯선 땅 대구에 정착했다. 나만이 고향의 먼 친척집에 맡겨져 초등학교를 가까스로 졸업했다.

읍내 주변 소작농들의 핍진한 삶, 뜨내기 장꾼들의 애환을 어린 눈으로 목격한 게 뒷날 내가 문학에 뜻을 두게 된 촉매가 되었다.

초등학교를 마치고 1954년에 대구로 나가 가족과 합류했다. 그 뒤 우리 가족은 고난의 어려운 세월을 억척같았던 어머니의 힘으로 견뎌냈고, 나는 중학교 때부터 고학으로 대학을 마쳤다.

집안 형편이 공부에만 몰두할 수 없었고, 학교 공부에는 애초 재주가 없기도 했다. 하류학교만 다녔는데도 학업성적은 늘 중간 아래였다.

누구와도 잘 어울리지 못하는 자폐에 가까운 울증, 홀연히 딴 생각에 사로잡히는 잡념 많은 사춘기에 나는 쉽게 문학의 길로 아련하게 빠져들었다.

그 동기는 토마스 만의 짧은 단편 ‘환멸’을 읽은 어느 날 충격으로 닿아왔다고 다른 글에서 고백한 바 있다.

이 세상이 필요로 하는 그 어떤 직업에도 적응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로 여겨질 때 여린 바이올린 선율처럼 예술적인 어떤 기미에 현혹되는 자신을 발견했다면, 그런 삶을 숙명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심약한 사람도 이 세상에서는 소수나마 존재한다는 예시였다.

그러므로 나는 시작부터가 생산적이고 힘찬, 현실성 강한 건강한 작품을 쓸 능력이 달린다는 데서 내 문학을 출발시켰다.

그런 초심은 지금까지 내 글의 결점임을 나는 알고 있으나 이를 만회해 보려는 어떤 작위적인 시도도 하지 않았다. 인간은 제 그릇의 담을 수 있는 양만큼 담게 마련이다.

좌익 아버지가 총살당한 하루 저녁을 소년의 시점으로 그려 1973년에 발표한 단편 ‘어둠의 혼’도 따지고 보면 가족사의 한 부분을 픽션으로 만들겠다는 작심 외, 민족 분단문제의 접근이란 이념성 없이 쓰여졌다.

당시 나는 변변한 이론서 한 권 제대로 읽지 못했고 우리의 현대사와 사회과학적 지식은 거의 상식선에 머문 정도였다.

“장남인 너는 사상에 미친 네 아비 길은 쳐다보지도 말고, 처자식 잘 건사하는 착실하고 정직한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훈육을 어머니로부터 귀 따갑게 듣고 자라, 이념 문제는 가히 공포로 내 의식을 지배했던 것이다.

외가 쪽은 사회 규범에 잘 적응하는 모범적 시민들이었는데, 나는 다분히 어머니의 그런 영향을 받아 성실한 생활인이 되려 노력했다.

민주화운동의 대표적 탄압 사례인 1974년에 발생한 ‘민청학련’ 사건이 소시민 의식에 안주하던 나의 정신을 송두리째 흔들었다. 나는 비로소 ‘당면 현실’을 인식하기 시작했고 정치, 경제, 사회과학 서적을 열심히 탐독했다.

분명 부계 쪽 피의 작동인 또 다른 욕망이 내 심저에 숨어 있음을 발견했으나 망령처럼 따라다닌 아버지의 공포를 떨쳐내는 데는 나의 실천력을 자제케 했다. 그 후 80년대 초반까지는 내 삶의 선택과 딛고 선 문학적 현실에 갈등을 겪은 어려운 고비였다.

1986년에 18년 동안 봉직한 출판사 직장을 놓자 전업작가로서 글 쓰기에 매달려, 내 소년기의 고단한 편린이 깔린 ‘마당 깊은 집’을 썼다.

그즈음, 진보주의자와 노동 세력의 응집력이 폭발한 현실에서 나는 회의적인 지식인으로서 심적 갈등을 겪다, 이를 우회하는 다른 출구로 쓴 소설이 일제하 민족 변절자의 자기 정화 과정을 그린 ‘바람과 강’과 독일 성장소설에 바탕을 두고 일제하 우리 현실에 적응시켜 본 ‘늘푸른 소나무’였다.

문학을 시작했을 때, 내 마음은 내가 소년기에 겪은 6ㆍ25전쟁을 꼼꼼하게 기록해보겠다고 작심했던 만큼, 18년에 걸쳐 쓰여진 ‘불의 제전’은 내가 가장 힘들여 쓴 소설이다.

이 소설에서 나는 내가 소년기에 서울과 고향에서 겪었던 기억과, 내 청춘기에 자리잡은 6ㆍ25전쟁을 바라본 관점에서 한 발도 움직이지 않은, 그러므로 어느 쪽 이념에도 경도되지 않고 전쟁 전후 우리네 삶을 진솔하게, 객관적 시점으로 그리려 노력했다.

이 긴 소설은 1950년 그 해 열 달간의 우리 민족이 당한 고통의 기록이다.

내가 최근에 쓴 연작소설 ‘슬픈 시간의 기억’은 젊었을 때 읽었던 서구 작가들의 ‘의식의 흐름’ 수법을 치매 과정에 있는 노인들을 매개로 시도해본 소설로, 역시 내가 즐겨 다루어온 일제치하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고난의 긴 세월을 살아온 팔순 노인들의 치유되지 못한 시간의 기억모음집에 해당될 것이다.

돌이켜 보건대 내 문학은 오늘, 이 자리의 현장성보다 6ㆍ25전쟁 전후의 내가 살아온 소년기에 큰 줄기를 내리고 있음을 보게 된다.

어쩔 수 없는 나의 한계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하는 일에 능력껏 최선을 다하지만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한계를 인식할 때가 있다.

아무리 해도 그 이상에 이를 수 없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때, 내가 여태 해온 문학은 져버린 꽃처럼 시들 수밖에 없다.

나는 그런 열등의식에 자주 시달린다. 내가 해온 문학에 서늘하게 닿는 비애를 달래는 길은 역시 글로써 이를 만회할 수밖에 없음이 내가 나에게 묻더라도 자명한 이치이다.

그래서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부지런한 습성대로 숨을 쉬는 한 무슨 일이든 해야 하기에, 쓰는 과정은 고통스럽더라도 그 작업이 그 중 내게는 손에 익은 분야요 보람 있는 일이라 여겨 지금도 글을 쓴다.

불면증에 시달리다 언뜻 잠에서 깨면 사위가 고요한 새벽 3시쯤이다. 찬물 한 잔 마시고 담배 한 대 꼬나 물고선 깜깜한 어둠을 밀치며 컴퓨터를 점등시킨다.

김원일/ 소설가

■연보

▲1942년 경남 김해 출생

▲1962년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1966년 대구매일신문 공모 ‘매일문학상’에 단편소설 ‘1961ㆍ알제리’ 당선 등단

▲1968년 영남대 국문과 졸업

▲소설집 ‘어둠의 혼’ ‘오늘 부는 바람’ ‘도요새에 관한 명상’ ‘환멸을 찾아서’ ‘그곳에 이르는 먼길’ 장편 ‘어둠의 축제’ ‘깊은 골 큰 산’ ‘노을’ ‘바람과 강’ ‘겨울 골짜기’ ‘마당 깊은 집’ ‘늘푸른 소나무’ ‘아우라지로 가는 길’ ‘불의 제전’ ‘사랑아, 길을 묻는다’ ‘가족’ ‘히로시마의 불꽃’ ‘슬픈 시간의 기억’ 등

▲현대문학상(1974) 한국소설문학상(1978) 한국일보문학상(1979) 동인문학상(1983) 요산문학상(1987) 이상문학상(1990) 이산문학상(1998) 기독교문화대상(1999)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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