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5년 8월8일 소련이 일본에 선전을 포고했다. 이틀 전인 8월6일 미국이 히로시마(廣島)에 원자폭탄 ‘리틀 보이’를 투하해 일본의 항복이 코 앞에 닥친 시점이었다.선전 포고와 동시에 소련 공군은 일본 관동군(關東軍)이 주둔해 있던 중국 동북 지방과 한반도 북단에 폭격을 시작했고, 8월13일에는 1개 사단의 소련 육군이 관동군을 격파하며 두만강 일대로 밀려들었다.
이틀 뒤인 8월15일 일본이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자, 소련군은 북한 지방으로 들어가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하며 열흘 남짓만에 북위 38도선 이북 지역을 완전히 장악했다.
소련의 대일전(對日戰) 참가는 한반도 분단의 한 원인이 되었지만, 소련의 참전을 오래 전부터 줄기차게 요구한 쪽은 미국이었다. 태평양과 유럽 전선에서 동시에 전쟁을 수행하고 있던 미국은 소련이 대일전에 참가해 일본의 군사력을 분산시키기를 원했다.
그러나 독일과의 전쟁에도 힘이 달리던 소련으로서는 동북아시아 쪽으로 군사력을 돌릴 여력이 없었다. 일본군의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 전쟁이 터지기 얼마 전인 1941년 4월13일, 소련과 일본은 모스크바에서 유효 기간 5년의 중립 조약을 체결한 바 있다.
이 조약에 따르면, 두 나라 가운데 한 쪽이 제3국과 전쟁을 하는 경우 다른 나라는 전쟁 기간 동안 중립을 지키도록 돼 있었다.
그러나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소련의 대일전 참가를 계속 종용했고, 유럽에서 전쟁이 끝나가던 1945년 2월의 얄타회담에서 스탈린은 독일이 패망한 뒤 두세 달 안에 일본과 전쟁을 시작하겠다고 루스벨트에게 약속했다.
독일의 무조건 항복으로 유럽 전쟁이 끝난 것이 그 해 5월8일이었으니, 스탈린으로서는 속셈이 뭐였든 약속을 지킨 셈이다.
고종석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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