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장에는 한 동안 무거운 침묵만이 흘렀다. 이윽고 정구영(鄭求瑛) 의원이 맨 처음 발언대로 나왔다. 정 의원은 간단하지만 명료하게 말했다. “나는 평소 소신대로 개헌에 반대합니다.”정 의원이 물꼬를 트자 찬반 토론이 시작됐다. 3선 개헌에 적극적으로 반대했던 김종필(金鍾泌)계 의원들은 상당수가 발언을 자제했다. 그도 그럴 것이 김종필씨가 며칠 전 박정희(朴正熙) 대통령과 만난 뒤부터 마음을 돌렸기 때문이다.
‘처삼촌의 말을 거역할 수가 없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었는가 하면 ‘생명의 위협을 느껴서’라는 소문이 흘러나오기도 했다. 사실 김종필씨는 박 대통령과의 면담 후에는 오히려 자파 세력들을 찬성쪽으로 돌리느라 애를 썼다. 그렇지만 몇몇 의원들은 김종필씨의 설득에도 요지부동이었다. 다만 이들은 아무 권한이 없는 윤치영(尹致暎) 당의장서리를 비판하는 방법으로 개헌 반대 의사를 간접적으로 밝혔다.
회의는 진통을 거듭했다. 영빈관 바깥 출입이 금지돼 식사도 안에서 해야 했다. 당론은 좀처럼 하나로 모아지지 않았다. 나는 양복 안쪽 주머니에 들어있는 선행 조건을 적은 메모지를 만지작거리며 죽 회의를 지켜봤다.
내가 발언권을 얻었을 때 밖은 이미 어둠이 깔려 있었다. 발언 시작 전 입술을 굳게 깨물어 보았지만 가슴이 뛰는 것을 억누를 수는 없었다. 그러나 전날 밤, 나는 이미 강을 건너기로 마음을 정했다. 나의 정치 생명, 어쩌면 목숨까지도 위협을 받을 수 있다고 충분히 짐작됐지만 여기서 주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근본적으로 3선 개헌에 반대해 왔습니다. 지금도 그 소신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대통령께서 나라를 위해 한번 만 더 하겠다고 합니다. 그렇더라도 우리 공화당에서 먼저 자가 숙정부터 하고 나서 국민에게 고개숙여 양해를 구하는 게 정치 도의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잠깐 숨을 멈췄다. 모든 의원들이 내 입만을 쳐다봤다. “그래서 나는 개헌에 대한 선행 조건으로 5개항을 제안합니다. 첫째, 권력형 부정부패의 책임자 이후락(李厚洛) 비서실장, 김형욱(金炯旭) 중앙정보부장은 즉각 물러날 것….”
내가 채 다음 항목을 말하기도 전에 회의장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이후락 김형욱이라는 이름이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잠시 뜸을 들인 후 나는 5개항을 모두 말했다. 그제서야 의원들이 박수를 보냈다. 어떤 의원들은 책상을 두들기면서 지지 의사를 보내기도 했다.
뜻밖의 나의 제의로 회의장에는 일순간에 변화가 생겼다. 나의 선행 조건은 만장일치로 채택됐다. 개헌 찬성파는 물론 반대파들도 선행 조건에 전적으로 찬동했던 것이다. 시간은 이미 자정을 넘기고 있었다.
그러나 의원총회 결의 사항은 곧바로 큰 벽에 부딪쳤다. 잠도 자지않고 회의 결과를 기다리고 있던 박 대통령이 이를 일언지하에 거부했기 때문이다.
김성곤(金成坤) 재정위원장과 장경순(張坰淳) 국회부의장이 재가를 얻으러 간 자리서 박 대통령은 책상을 걷어차고 컵을 내던지면서 화를 냈다는 것이다. “누가 이 따위 선행 조건을 내세웠어? 이만섭 의원? 도장을 찍으려면 찍고 말려면 말지 선행 조건은 무슨 선행 조건이야.”
박 대통령의 격노에 김성곤 의원과 장경순 부의장이 혼비백산해 그냥 돌아왔고,선행 조건은 유야무야될 판이었다. 그러나 난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이왕 내친 걸음이었다. 난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당 지도부의 설명이 부족했기 때문일 겁니다. 대통령과 나라를 위하는 일인데, 대통령께서 그렇게 화를 낼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다시 설명을 드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개헌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이번에는 장경순 부의장이 혼자 청와대로 갔다. 김성곤 의원이 배탈이 나 죽을 먹으러 집으로 갔기 때문이다. 나를 포함해 모든 의원들이 초조하게 장 부의장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는 동안 생각지도 않았던 해프닝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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