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독국(押督國)은 우리가 원삼국(原三國) 시대라고 부르는 시기에 경북 경산 일대에 존재했던 소국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압량(押梁)이라고도 불렸던 이 나라는 신라의 모태인 사로국의 파사 이사금에 의해 기원후 102년 정복당했다.역사서에 단 몇 줄 정도만 언급된 채 잊혀졌던 압독국의 실체가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82년, 지금으로부터 꼭 20년 전이다. 금동관 은관식 등 흔히 볼 수 없는 귀중한 유물들이 도굴되어 국외로 팔려나가다 당국에 의해 적발되었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경산의 임당동 고분군 발굴이 이뤄지게 됐다.
영남대 박물관에서 실시한 조사에서 모두 18기의 커다란 무덤이 발굴됐다.
상당수 무덤이 도굴된 뒤였지만 8기의 무덤에서 금동관과 은관식, 굽은옥 장식의 유리목걸이, 금동과 은제 고리자루큰칼, 금동신발 등 화려한 유물과 무덤 주인공의 인골, 평생 이들을 보좌하며 살다가 끝내 죽임을 당해 함께 묻힌 순장자들의 인골이 고스란히 출토되었다.
조사 결과, 압독국 왕족들의 무덤임이 밝혀졌다. 길이 4㎙, 너비 2㎙, 깊이 2㎙ 규모의 으뜸덧널, 저승에서 사용하기 위한 수백 점의 유물이 들어있던 길이와 너비 각 4㎙, 깊이 1.5㎙에 달하는 딸린덧널, 그리고 지름 18㎙, 높이 4㎙의 봉분이 이어져 커다란 동산을 이룬 모습 등은 당시 압독국 최고 지배층의 위력과 문화적 수준이 실로 대단했음을 짐작케 했다.
그 후 1986년 여름 고고학을 전공하는 몇몇 후배들과 함께 임당동 고분군 옆에 자리한 조영동 고분군을 찾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위용을 자랑하던 거대한 봉토무덤은 간 곳이 없고 금반지 등 유물과 덧널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나무조각 등이 어지럽게 나뒹굴고 있었다.
개발 붐을 타고 이곳이 택지로 지정되면서 시굴 조사조차 거치지 않은 채 무덤이 파헤쳐진 것이었다. 다행히 언론을 통해 이 사실이 알려져 비난 여론이 일자 개발이 잠정 중단되고 조영동은 물론, 임당 지역 고분군 전체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뤄질 수 있었다.
이 발굴에서도 중요 유물들이 무더기로 출토됐고 당시 사람들의 집자리, 성터 등 관련 시설물들도 발견됐다. 그리고 커다란 봉토무덤을 만들기 이전 시대의 문화유적들도 함께 모습을 드러내 무덤만도 1,500여기가 발굴됐다.
이로써 임당 지역에서 형성된 약 1,000년(기원전 200년~기원후 700년경)에 걸친 장구한 역사가 마침내 햇빛을 보게 됐다.
발굴조사를 하며 겪은 많은 일들 가운데 기억에 남는 것이 한가지 있다. 한 발굴단원이 커다란 봉토무덤을 어떻게 파야 하는지 알아보고 발굴 중 혹시 있을지 모르는 사고를 예방하려면 무덤 주인공과 교감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봉토 자락에서 밤을 새워 홀로 술을 마시며 나름의 ‘의식’을 치르다 새벽녘 술에 만취해 쓰러졌다. 결국 영혼과의 대화는 실패했지만 아무런 사고 없이 발굴이 진행될 수 있었던 것은 그런 순수한 열정에 감동한 무덤 주인들이 보살펴준 덕이 아닐까 싶다.
/김용성 영남대박물관 학예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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