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 말기에 재계가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재벌 관련 정책이 나올 때마다 정부를 거세게 몰아부치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우리가 어떻게 정부에 대항할 수 있느냐”고 하지만 저변에서는 “더 이상 밀려선 안된다” "이번 기회에 얻어낼 것은 확실하게 얻어내야 한다”는 의도가 엿보인다.각종 스캔들로 정권의 레임덕 현상이 분명해졌고, 대통령 선거를 앞둔 정치권이 재계의 환심을 사려 한다는 점 등이 재계가 목청을 높이는 배경이다.
*재계의 거침없는 목소리
재계는 올초부터 사외이사제 의무화 폐지, 집단소송제 도입 철회, 출자총액제한제 완화, 기업연금제 도입 등 기업 이익에 반하는 정부 정책에 끊임없이 반발해왔다. “대통령 후보의 공약을 비교 평가하겠다”(경총) “차기정권은 대통령 4년 중임제 전환, 불법 정치자금 고해성사 및 사면, 선거공영제 등을 실시해야 한다”(전국경제인연합회)는 등의 정치적인 요구도 서슴없이 했다.
재계의 목소리는 최근 정부의 주5일 근무제 입법 강행 문제에 이르러 절정에 달하고 있다. 전경련 손병두(孫炳斗) 부회장은 지난달 24일 제주 최고경영자 서머포럼에 참석, “삶의 질 향상을 위해 주5일 근무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논리라면 (놀고 먹는) 거지가 많은 나라가 삶의 질이 가장 높은 나라라는 얘기냐” “정부가 대주주로 있는 은행권을 동원해 주5일 근무제를 먼저 시행한 것은 반칙”이라고 말하는 등 주 5일 근무제 강행에 대해 격한 반응을 보였다.
박용성(朴容晟) 대한상의 회장도 지난달 31일 방용석(方鏞錫) 노동부장관에게 공개 서한을 보내 “정부가 노동계 주장에 밀려 기업현실과 국제기준에 크게 어긋나는 내용을 제시한다면 경제의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리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경고까지 했다.
*주5일 근무제 저지 총력
재계의 ‘목소리 키우기’는 최근 주5일 근무제 저지에 집중되고 있다. 웬만한 재벌개혁 정책은 이미 재계의 파상 공세로 사실상 도입이 무산될 지경에 이르렀거나 절름발이 정책으로 전락했기 때문. 정부가 기업 지배구조 개선과 경영 투명성 강화를 위해 4월 도입하려던 증권 관련 집단소송제는 “소송 남발로 기업 부담만 가중된다”는 재계의 주장이 먹혀들면서 국회 법사위에 상정된 채 사장될 위기에 처해있다.
재벌의 문어식 확장을 막기 위한 장치인 출자총액제한제 역시 재계 반발에 밀려 기형적인 모습으로 변했다. 이 제도의 적용을 받지않는 ‘동종 업종’ 범위가 ‘출자사 매출액의 25%, 피출자사 매출액의 50% 이상 업종’에서 ‘출자사 매출액의 25%를 넘는 업종이 1개일 경우 매출규모 2위이면서 매출액이 15% 이상인 업종’과 ‘피출자사는 25% 이상이면서 매출비중이 가장 큰 업종'으로 크게 완화한 것이다.
재계는 “주5일 근무제가 입법화하면 기업활동이 크게 위축된다”고 주장하면서도 연내 입법화 가능성은 낮다고 보고 있다. 대선을 앞둔 정치권이 섣불리 재계가 극력 반대하는 법안을 통과시킬리 만무하다고 보는 것이다.
*차기정권의 보증수표 받자
재계의 ‘목청 높이기’는 무엇보다 차기 정권에 보내는 메시지 성격이 강하다. 대선을 앞두고 기업 이익에 부합하는 각종 경제정책을 제시, 각 당 후보들로부터 보다 친(親) 기업적인 공약을 이끌어내려는 계산인 것이다.
실제 전경련은 4월 발표한 ‘차기 정부 정책과제’를 통해 ▲공공ㆍ재정 부문의 법인세 단계적 폐지 ▲노사정위원회 폐지 및 해고절차 간소화 ▲기업 분식회계 관행의 일괄 사면 ▲기준근로시간 등 근로시간 관련조항의 삭제 ▲법정퇴직금 월차ㆍ생리휴가 폐지 등 기업에 유리한 정책 수립을 대선 후보측에 촉구했다.
지난달 열린 제주 서머포럼에는 대선 후보를 초청, ‘기업 규제 개혁’ ‘시장에 대한 정부 개입의 최소화’ 등을 약속 받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정부 입장과 시민단체 반응
경제 부처 관계자들은 재계의 이 같은 움직임을 애써 외면하고 있다. 다만 그동안 주요 재벌 개혁정책 입안 및 추진 과정에서 재계 의견을 충분히 반영했는데도 불구, 계속 정부 정책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정부 흠집내기’에 다름 아니라며 불쾌해 하고 있다.
공정위 고위 관계자는 재계의 출자총액제한제 폐지 요구에 대해 “지난해 재계 의견 수렴 및 국회 심의 절차를 거쳐 제도를 개선, 4월부터 시행에 들어갔는데 불과 몇달만에 폐지를 주장하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반문했다.
참여연대 경제개혁센터 김상조 소장(한성대 교수)은 “재계는 지난해말부터 경기 침체, 정권 레임덕 현상 등을 틈타 지난 4년간의 경제개혁을 무효화하기 위해 정치권과 정부 등에 다양한 형태의 압력을 가하고 있다”며 “재계가 출자총액제한제 폐지 등과 같은 반개혁적 요구를 할 수 있게 된 데는 정부가 원칙 없이 정치권과 재계의 압력과 요구에 굴복한 자업자득적 측면이 강하다”고 말했다.
■대선의 해마다 충돌
대통령 선거가 예정된 해마다 재계와 정부는 대립했다. 임기말 재벌을 손에 쥐어놓으려는 정권과 벗어나려는 재계간에는 갈등과 대립이 불가피했다.
때마다 ‘재벌 길들이기’ 정책이 나왔고, 재계는 이에 밀릴세라 힘빠진 정권을 거세게 밀어붙여 일정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정부와 재계는 5년마다 밀고 당기는 일전을 거듭해온 것이다.
1997년 5월 31일 정부는 김영삼 대통령의 5·30 정치개혁 담화 후속 걍제분야 대책을 발표했다. 빚많은 기업에 중과세하고, 30대그룹의 연결재무재표 작성을 위무화하며, 동일계열 여신한도제를 확대실시한다는 등 재벌규제책이 대부분이었다.
재계는 “정치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경제를 희생양으로 삼은 졸속 정책”이라고 맹비난했다. 여기에 그룹 회장실과 기조실 해체가 추진되자 반발은 극에 달했다. 강경식 부총리 취임이후 시작된 정부와 재계의 대립과 갈등은 12월 외환위기까지 이어졌다.
1992년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의 국민당이 급부상한 3·24총선 결과는 정부와 재계의 관계가 원만치 못할것임을 예고한 것이었다. 정부는 재벌의 집중 완화를 골자로한 '신산업정책'의 추진을 서둘렀다. 정부의 현대그룹계열사에대한 제재조치에 숨죽이던 재계는 이정책의 핵심이 재벌해체에있다며 여신관리제도 강화, 상호 지급보증 축소, 연결재무재표작성등 재벌규제정책을 폐지 또는 완화 해줄것을 주장하고 나섰다. 6공 4년동안 찾아볼수없었던 전무 후무한 '재벌의 반란'이 먹혀든 때문인지 재벌 규제정책은 시행시기가 아예 연기되거나 당초 안에서 크게 후퇴한 내용으로 시행되는 곡절을 겪어야 했다.
황상진기자 april@hk.co.kr
■청와대는 선긋기
청와대는 재계가 주5일 근무제, 공정거래위의 부당 내부거래 조사에 불만을 토로하는 데 대해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분위기다.
정부 정책의 근간을 흔들거나 조직적으로 저항하는 것은 아니라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별 정책에 대해 자기 목소리를 내는 수준으로 보는 것이다.
그렇다고 완전히 무관심한 것은 아니며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다. 임기말을 틈타 적정한 선을 넘는 반발을 한다든지, 정부와 재계가 합의했던 경영 투명성 제고, 재무구조 개선 등 '5+3' 원칙을 폐기하려 한다면 청와대도 적극 대처하겠다는 입장이다.
현재 청와대가 취하고 있는 자세는 재계와 충분히 대화하겠다는 것이다. 재계가 주5일 근무제에 대해 강하게 이의를 제기하는 점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으며 논의해야 할 대목이라는 얘기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정부 초안이 국회에서 노동조합측에 유리하게 수정되기 마련이어서 재계가 미리 쐐기를 박는 측면이 있다"면서 "국회 수정을 고려, 정부가 추곡 수매가를 낮춰 내놓는 상황으로 보면 된다"고 말했다.
공정위의 부당 내부거래 조사 논란에 대해서도 비슷한 태도이다. 공정위 조사발표가 청와대나 정부 전체의 지시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설명이다. 재계가 일제 조사에 불만을 갖고 있다면 공정위가 그 의견을 청취해 볼 필요는 있다는 생각이다.
청와대는 그러나 "전경련 등 재계의 목소리가 의견 개진 수준을 넘어 임기말의 권력 누수를 겨냥한 과거 회귀 성격을 띤다면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쐐기를 막았다. 이해나 납득에도 선이 있다는 얘기다.
이영성기자 leey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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