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미 복희(伏犧)ㆍ여와(女 ) 남매혼 신화를 통하여 인류 역사의 초창기에 대홍수가 있었고 여기에서 살아남은 극소수의 인류가 다시 문명을 이어갔던 것을 알고 있다.그런데 그리스 지역과는 달리 황하라는 큰 강을 끼고 살아온 중국에는 홍수와 관련된 신화가 창세의 한 시기에 그치지 않고 문명의 시대에 들어와서도 발생한다.
가령 태평성대를 구가했다고 하는 요(堯) 임금 시절은 신화시대의 후기 혹은 전설시대의 초기에 해당한다 할 것인데 이 시절에도 어마어마한 홍수가 엄습한 적이 있었다. 무려 20여 년에 걸친 대홍수를 다스림과 관련하여 희비가 엇갈린 영웅적인 인물이 곤(鯀)과 우(禹)이다.
요 임금 때의 대홍수에 대해서는 ‘맹자(孟子)’와 ‘서경(書經)’ 등의 옛 책에 기록이 있다. ‘맹자’에 의하면 이때 물이 역행하여 중국 전체에 범람하였고 이 때문에 파충류가 극성하여 사람들은 지상에 살지 못하고 나무 위나 동굴에 집을 짓고 살았다 한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이 ‘물이 역행’했다고 하는 표현이다. 이것은 황하가 정상적으로 흘러가지 않고 옆으로 넘쳐서 거주지를 덮친 것을 의미한다.
어진 요 임금은 이러한 사태를 방관할 수 없었고 곧 조정에서 회의를 열어 홍수를 다스릴 적임자를 추천하도록 하였다. 그랬더니 신하들은 이구동성으로 곤(鯀)이라는 인물을 추천하였다.
곤은 ‘산해경(山海經)’에 의하면 대신(大神) 황제(黃帝)의 손자라 하였으니 그도 천신의 일족인 셈이다. 곤은 곧 치수(治水)에 착수하였는데 도도히 흐르는 물을 막기 위해 둑을 쌓는 일에 열중했다. 그러나 둑을 쌓았어도 강한 물길에는 역부족이었다.
둑은 무너져 버렸고 다시 더 튼튼한 둑을 쌓기 위해 많은 흙이 필요했다 “흙만 많이 있으면 얼마든지 둑을 쌓아 저 홍수를 막을 수 있을텐데.” 흙에 궁핍함을 느끼던 곤은 마침내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것은 천제가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식양(息壤)이라고 하는 흙이었다.
그러나 식양은 천제의 보물창고에 있어서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곤은 고민 끝에 마침내 몰래 식양을 훔쳐내고야 말았다. 곤이 식양을 땅 위에 뿌리자 저절로 흙이 불어나더니 순식간에 산만큼 커지는 것이 아닌가? 곤은 성공을 예감하며 다시 둑을 쌓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곤이 식양을 훔쳐간 사실은 이내 천제에게 알려졌다. 천제는 크게 노하였고 불의 신인 축융(祝融)을 보내 곤을 처형하도록 지시하였다. 마침내 곤은 북방의 음습한 땅 우산(羽山)이라는 곳에서 축융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다.
곤의 9년간에 걸친 치수의 노력은 이렇게 실패로 돌아가고 만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이상한 일이 생겼다. 곤의 처형당한 시체가 삼년이 되도록 썩지 않고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닌가.
이 소식을 듣고 괴이하게 여긴 천제는 천신으로 하여금 오도(吳刀)라는 예리한 칼을 가지고 가 곤의 시체를 베도록 하였다. 오도가 곤의 배를 가른 순간 그 속에서 외뿔 달린 용, 곧 규룡( 龍)이 튀어나왔다. 이 용이 후일 사람으로 변하여 우(禹)가 되었다.
곤이 홍수를 막기 위해 식양을 훔쳤다가 처형을 당한 일은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을 위해 불을 훔쳐다 주었다가 중벌을 받은 일과 비교되어 흥미롭다.
아울러 우리는 곤의 살해된 몸에서 아들 우가 나오고 우가 아버지의 실패를 딛고 성공하는 스토리에서 외디푸스 콤플렉스의 희미한 잔영(殘影)을 엿볼 수 있을른지도 모른다. 신화적 모티프는 풍토와 문화적 차이에 따라 지역적으로 현저하게 혹은 미약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제 우의 성공적인 치수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하자. 우는 아버지인 곤이 취했던, 둑을 쌓아 물길을 막아버리는 방법은 실패의 전례가 있기 때문에 그대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우가 택한 주요한 방법은 물길을 막는 것이 아니라 물길을 터서 분산시키는 것이었다.
우의 작업에는 훌륭한 조력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날개 달린 응룡(應龍)을 비롯한 여러 용들이었는데 이는 우 역시 본래 용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응룡은 강한 꼬리로 땅을 그어서 물길을 팠다. 한번은 황하의 신인 하백(河伯)이 나타나 푸른 색의 큰 돌을 건네고 사라졌다.
거기에는 물길이 잘 그려져 있어서 큰 도움이 되었다. 그 돌을 하도(河圖)라고 불렀다. 또 한 번은 동방의 신인 복희(伏羲)가 현신하여 대나무 쪽처럼 생긴 옥을 주었는데 그것으로 하늘과 땅을 측량할 수 있었다. 그 옥을 옥간(玉簡)이라고 불렀다.
이처럼 치수에 전력을 다하느라 너무 바쁘고 시간이 없어서 우는 나이 서른이 되도록 그 흔한 데이트 한 번 못해 보고 결혼은 꿈도 못 꿀 형편에 놓여 있었다.
그런데 다 때가 있고 연분이 있다고 하던가? 노총각 우에게도 짝을 찾을 기회가 온 것이었다. 우가 남쪽의 도산(塗山)이라는 곳에서 치수에 열중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하얀 구미호(九尾狐) 한 마리가 우 앞에 나타나 살랑 살랑 꼬리를 흔들어대지 않는가? 꼬리 아홉 개 달린 여우는 요즘에는 요물로 생각하지만 고대에는 가정과 나라가 번창하게 될 조짐으로 여겼다.
때가 왔음을 예감한 우는 분발하여 마침내 그 지역에서 여교(女嬌)라는 아름다운 처녀를 만나 결혼하게 된다. 그러나 이들의 결혼생활은 순탄치 못하였다. 우는 치수에 바빠 신혼 나흘 만에 아내를 두고 출장을 갔기 때문이었다. 이들의 파국은 엉뚱한 데서 일어났다. 우가 환원산(轘轅山)이란 곳에서 작업을 할 때였다.
우는 산 위에서 작업을 하면서 아내에게 북소리가 울리면 밥을 가져오라고 일렀다. 아내가 없을 때 우는 곰으로 변해 일을 하고 있었는데 잘못 돌을 걷어차서 그것이 걸어둔 북에 맞아 소리가 나고 말았다.
우의 아내가 밥을 가지고 와 보니 남편이 곰이 되어 있지 않은가? 우의 아내는 놀라 달아났고 곰이 된 우가 급히 쫓아오자 돌로 변해 버렸다. 우가 이 때 아내에게 “내 아이나 내놓으시오”라고 외치자 돌이 갈라지면서 아들이 튀어나왔다.
우의 아들 ‘계(啓)’는 이렇게 탄생하였으나 우의 결혼생활은 그만 이것으로 끝이 나고 말았다. 엄청난 홍수를 다스리느라 가정까지 희생한 우, 그러나 무려 13년 간에 걸친 그의 노력 덕분에 마침내 치수는 성공하였고 이제는 모두가 편안한 삶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요 임금, 순(舜) 임금의 뒤를 이어 온 백성의 추대를 받아 새로운 임금으로 즉위하였다.
우는 임금이 된 후 두 가지 중요한 일을 하게 된다. 한 가지는 신하 백익(伯益)을 시켜 그동안 섭렵하면서 파악했던 중국 전역의 지리와 풍물을 기록하여 책으로 펴낸 일이다. 이 책이 바로 ‘산해경’이라고 한다.
또 한 가지는 천하의 제후들이 바친 구리를 모아 아홉 개의 거대한 세발 솥을 만든 일이다. 이때 우는 구리 솥의 표면에 각지의 요괴 귀신 등의 형상을 새겨넣어 백성들로 하여금 미리 알고 해를 입지 않도록 하였다 한다. 우는 이 모든 업적으로 인하여 후세에 길이 추앙되었다.
중국인들은 항시 우를 존중하여 ‘위대한 우 임금(大禹ㆍ대우)’으로 기려왔다.
곤과 우의 치수 신화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음미해야 할 부분이 있다. 우선 곤과 우의 치수 방식의 차이에 따른 실패와 성공의 갈림은 흥미로운 정치적 알레고리를 낳는다.
곤은 물길을 막아서 실패하고 우는 물길을 터서 성공하였는데 이 내용은 후세에 임금이 백성들의 언로(言路)를 잘 열어주어 비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교훈으로 활용된 것이다.
다음으로 곤과 우의 치수신화는 고대 중국에서 황하의 조절, 곧 물을 다스리는 일이 국가의 운명과 관련된 중대사였음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중국인들이 스스로를 용의 후예로 자처할 만큼 용의 전설이 풍부한 것도 이와 관련된다. 용은 물을 관리하는 신성한 동물이기 때문이다. 오리엔탈리즘의 혐의가 없지는 않으나 근대에 한 서구학자는 심지어 고대 중국을 ‘수력국가(水力國家)’로 규정하기도 하였다.
마지막으로 곤과 우의 치수신화는 고대 중국이 이 시점에서 부자 상속의 가부장 사회로 진입한듯한 느낌을 우리에게 준다. 곤과 우가 부자간에 사업을 넘겨받는 내용도 그러하지만 우가 아내와 결별하면서 아들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우가 개창한 하(夏) 왕조에 이르러 아들인 계에게 왕위를 물려줌으로써 과거에 요ㆍ순ㆍ우로 이어지던 선양(禪讓)이라는 합의 추대에 의한 왕권계승 방식이 사라지고 개별 혈통의 독점적인 왕조 국가가 출현하기 때문이다.
글 정재서 이화여대 중문과 교수
그림 서용선 서울대 서양화과 교수
■수력국가론(水力國家論)이란?
칼 비트포겔(Karl Wittfogel)이 그의 저작 ‘동양적 전제주의’에서 구사한 용어로 동양사회는 대규모 수리 관개시설을 필요로 하고 이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전제적인 국가제도가 성립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아시아적 생산양식’ 가설을 뒷받침하는 이론으로 동양사회의 정체성, 후진성, 비민주성 등을 설명하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서구인의 동양에 대한 편견, 이른바 오리엔탈리즘적 사유의 표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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