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욱등 사회·정치사찰 중지···"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기자회견 다음날부터 개헌파는 반대 세력에 대한 본격적 설득 작업을 시작했다. 이후락(李厚洛) 비서실장, 김형욱(金炯旭) 중앙정보부장, 김성곤(金成坤) 재정위원장, 길재호(吉在號) 사무총장 등 네 명은 청와대 비서실장 방에 아예 진을 쳤다.
이들은 그 때까지 서명하지 않은 의원들을 한 사람씩 이 곳으로 불렀다. 어지간한 강심장이 아니면 서명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통령을 직접 만나 얘기해 본 뒤에 서명하겠다던 공정식(孔正植) 의원 등에게는 서명을 받고 난 뒤에야 대통령을 만나게 해 주었다.
대통령 기자회견 사흘 뒤인 1969년 7월29일 공화당은 마침내 의원총회를 소집했다. 개헌안 발의 서명을 공식적으로 받기 위해서였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영빈관 의원총회이다.
전날인 28일 밤 나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서른 한 살에 국회의원이 된 이후 가장 힘든 순간이었다. 잠이 오지 않았다. 3선 개헌 불가라는 소신을 굽힐 수는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박 대통령과의 개인적 의리를 헌신짝처럼 내팽개칠 수도 없었다.
동 틀 무렵이 다 돼서야 나는 마침내 마음을 굳혔다. 선행 조건을 내걸고 투쟁한다는 결심이었다. 내가 끝내 개헌 반대를 외친다고 해도 현실적으로 이를 막기는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차라리 이를 계기로 당시 정치 상황의 문제점을 고치는 게 낫다는 판단이었다. 나는 메모지에 선행 조건을 하나씩 써 내려 갔다.
첫째, 권력형 부정부패의 책임자인 이후락, 김형욱은 즉각 물러날 것. 둘째. 중앙정보부는 대공 사찰에만 전념하고 정치 사찰은 일절 하지 말 것. 셋째. 당의 체질을 창당 이념에 맞게 개혁할 것. 넷째, 국민투표는 지는 한이 있더라도 공명정대하게 할 것. 다섯째, 권오병(權五柄) 문교부장관 해임건의안 파동 때 제명한 예춘호(芮春浩) 양순직(楊淳稙) 의원 등 5명을 복당시킬 것.
나의 각오는 비장했다. 만에 하나 일이 잘못 된다면 첫째 조건 때문에 김형욱 부장의 보복을 감수해야만 했다.
혹자는 나의 이 선행 조건이 김성곤 의원 등 대구 경북 출신 의원들과 사전에 의논해서 만든 것이 아니냐고 추측하는데 그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김성곤 의원은 이후락 실장 등과 같은 개헌 추진 세력이었으므로 이들과 등을 돌릴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나는 선행 조건을 다시 한번 읽어 본 뒤 집사람을 불렀다. “이후락, 김형욱을 물러나라고 하는 선행
조건은 아주 위험한 발언이오. 그렇지만 나는 내일 반드시 할 것이오. 문제는 내가 그 말을 하면 김형욱이 무슨 짓을 할 지 모른다는 것이오.
당신도 알다시피 김형욱은 김영삼(金泳三) 의원의 얼굴에 초산을 뿌리려고 했다는 이야기도 있소. 그리고 얼마 뒤 인천 앞 바다에 떠 오른 시체 2구가 그 하수인이라는 말도 나돌고 있오. 나도 그렇게 되지 말라는 법이 없으니 내일 당신은 집을 깨끗이 치워 놓으시오. 혹시 습격을 받더라도 뒤를 깨끗이 해 놓아야 하지 않겠소.”
집사람은 나의 소신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으나 굳은 표정으로 입술만 깨물고 있었다. 정치인의 아내로서 비애가 아닐 수 없었다.
날이 밝았다. 나는 주머니의 메모지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말없이 문밖까지 따라 나온 집사람에게 나는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집을 잘 지켜 주시오. 나는 오늘 목숨을 걸었소.”
의원총회 장소는 영빈관이었다. 현재의 신라호텔 별관 자리이다. 의원총회는 예정보다 늦은 오전 10시40분에 시작됐다. 소속 의원 109명 가운데 101명이 참석했다. 김택수(金澤壽) 원내총무가 개회를 알렸다. 역사적인 영빈관 의원총회가 마침내 시작된 것이다.
7대 국회 때 대구에 시찰 온 박정희 대통령과 악수하고 있다. 박 대통령 왼쪽에서 웃고 있는 사람이 김종필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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