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 년이 지난 뒤에야 그 여자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나이기도 하고 당신이기도 한, 어디서나 볼 수 있고 언제나 헤어질 수도 있는’ 그 여자에게 소설가 신경숙(39)씨는 J(제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신경숙씨가 소설집 ‘J 이야기’(마음산책 발행)를 펴냈다. 원고지 20매 분량의 짧은 소설 44편이 실렸다. 신씨가 1985년 스물두 살의 나이로 등단한 뒤 그의 이름을 확고하게 자리매김한 소설 ‘풍금이 있던 자리’를 발표할 무렵까지 신문과 잡지에 쓴 작품들이다.
그는 스물아홉 살이었던 1992년 단편 ‘풍금이…’를 썼고 이듬해 이 작품으로 한국일보문학상을 수상했다. 20대의 끝이었다.
“서른이 되기 전까지, 그러니까 소설집 ‘풍금이 있던 자리’를 출간하기 전까지는 원하든 원치 않든 많은 글을 써야 했다. 1년에 단편 한두 편 정도를 청탁받던 때였다.
한 치 앞을 가늠할 수 없는 20대였다.” 기댈 것은 오로지 젊음밖에 없던 시절에 쓴 짧은 소설 속에서 그는 수많은 여자들을 만들어냈다. 우리 나이로 마흔 살이 된 신씨는 이제 그 여자들의 사연을 모아 한 사람의 이야기, ‘J 이야기’로 묶었다.
시골 작은 마을에서 나고 자란 J는 대학교에 들어가면서 서울로 올라와 오빠와 함께 살았던 사람이다. 작가의 개인사를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하는 설정이다. J는 대학을 졸업한 뒤 독립해서 출판사를 다니다가 8년 동안 사귄 남자와 결혼해 네 살 난 딸 연이를 두었다.
작가가 전하는 J의 작은 이야기들은 밝고 유쾌하다. 아름다운 것들을 가려내 애틋하게 쓰는 신씨의 소설에 익숙해진 독자들을 놀랄 만하다. 짧은 문장을 구사해 속도감이 있는 데다 툭 웃음이 터져 나오게 만드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분량이 짧은 소설이어서 경쾌한 분위기를 갖게 되지 않았을까”라고 말하면서도 신씨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래도 암담하고 초조하기만 했던 스물 몇 살에 썼는데….” 이웃집 여자아이의 조용하고 슬픈 표정에 야릇한 감상을 느꼈다가, 남자답게 우하하 너털웃음을 터뜨리는 것을 보고 어이없어 하면서도 함께 웃음을 터뜨리는 J.
자가용을 사달라고 남편에게 조르다가도 앞뒤로 꽉꽉 막힌 차 때문에 두 시간쯤 약속이 늦었다고 불평하는 J.
옛사랑과의 재회를 앞두고 혹독한 다이어트를 했다가 약속 장소에서 배가 불룩 나온 대머리 남자를 보고 휘청거리는 J. 당돌하고 하고 싶은 것이 많고 삶에 대한 의욕이 꽉 들어찬 J를 두고, 작가 자신도 놀랍다고 한다.
이 유머러스한 작품들 틈새에서도 내면의 무늬를 아로새기는 신씨 특유의 감수성을 발견할 수 있다.
‘나는 때로 고아처럼 느껴져요’라는 서글픈 제목의 노래로부터 찾아내는 영혼의 울림, 셀로판지가 뭔지 몰라 제대로 발음도 못하는 아버지에게 문득 느끼는 하염없는 연민 같은 것이 그 흔적이다.
신씨는 새로운 책을 내는 것이 점차로 두려워진다고 했다. 등단 17년, 소설집 4권과 장편 4권을 펴낸 그의 고백이다. 책을 처음 내는 기분이라고, 독자들이 자신의 책을 읽고 어떻게 생각할까 두렵다고 한다.
그동안 소설 속에 숨어 자신을 가려온 것 같다는 그가 ‘J 이야기’에서 손을 들고 이렇게 말한다. “나, 여기 있어요.”
김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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