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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 이만섭/(8) 3선개헌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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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 이만섭/(8) 3선개헌④

입력
2002.08.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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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계자 얘기까지 나오자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은 버럭 화를 내면서 소리를 질렀다. “4년 뒤에 누가 나한테 ‘정권 여기 있습니다’ 하면서 다시 내놓겠어?” 나는 이 말에 다소 반발심 같은 게 생겨 덩달아 목소리를 높였다. “각하, 후계자가 일을 잘 하면 꼭 각하께서 다시 하실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이 말에 박 대통령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했다. 나는 ‘아차’ 싶었다.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었는데 나도 모르게 흥분했던 것이다. 박 대통령의 노기는 대단했다. ‘허리에 권총이라도 차고 있었더라면 빼서 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나는 얼른 말을 돌렸다. “그럴 때는 나라의 큰 지도자로서 후배 대통령을 뒤에서 도와 주시고, 또 나라의 갈 길을 인도해 주시면 되지 않습니까.”

박 대통령은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좋게 보면 박 대통령은 어쩌면 자신이 벌여 놓았던 일을 깨끗하게 마무리했으면 하는 집념이 강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냉정하게 생각하면 ‘나 말고는 이 나라를 이끌 사람이 없다’는 독선에 조금씩 사로잡혀가고 있었다.

나는 박 대통령이 주춤하는 사이 간곡하게 3선 개헌은 안 된다고 거듭 밀어붙였다. “저는 이 나라가 민주주의를 꽃피우려면 두 가지 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평화적인 정권 교체입니다. 그것은 꼭 야당에게 정권을 넘겨 준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또 다른 하나는 정권이 바뀌더라도 정치 보복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점입니다.

이 두 가지가 민주주의의 요체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사실 각하 주위에서 개헌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 중에는 진정 나라를 위하는 마음보다 정권을 내놓게 되면 자기들이 죽는다는 생각에서 자기들이 살기 위해 개헌을 하자고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말을 마친 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한동안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슬쩍 고개를 들어 박 대통령의 얼굴을 살펴 보니 기색이 말이 아니었다.

인간적으로는 너무 안타까웠다. 사실 박 대통령은 군에 있을 때부터 정의감이 강하고 바른 소리를 잘하는 분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 분이 정의롭지 못한 3선 개헌을 하려고 하니 얼마나 자신도 괴로웠을까.

나는 박 대통령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박 대통령이 이론적으로 나를 설득하지 않고 심정에 호소하고 나오는 바람에 내 마음도 편치 않았다. 그러나 무려 2시간 40여분에 걸친 면담은 결국 무위로 끝났다.

청와대를 나오면서 나는 다시 한번 내 소신을 밝혔다. “각하께서 3선 개헌을 하지 않는 방향으로 빨리 결단을 내려 주셔야 합니다. 아니면 나라는 극도로 혼란스러워 질 겁니다.”

후일 김성곤(金成坤) 의원에게서 들은 얘기로는 박 대통령은 내게 상당히 서운해 했다고 한다. 김 의원이 나와 면담한 결과를 묻자 “대체 고집이 어찌나 센지, 아무리 얘기해도 듣지를 않아”라며 짜증부터 냈다고 한다.

박 대통령의 대구사범 동기 동창인 왕학수(王學洙)씨가 개헌을 만류하는 얘기를 했을 때도 박 대통령은 “어쩌면 자네도 그렇게 이만섭이와 똑 같은 소리만 하는가”라며 벌컥 화를 냈다고 한다.

어쨌든 이 때 박힌 미운 털은 내 정치 인생에 커다란 좌절을 가져 왔다. 나는 이후 8대 총선 때 가까스로 공화당 공천을 받았지만 당의 비협조, 이후락(李厚洛) 중앙정보부장의 은밀한 방해 공작 때문에 낙선했고, 9대 총선 때는 아예 공천조차 받지 못했다.

박 대통령은 나와 면담한 지 한달 여가 흐른 1969년 7월25일 기자회견을 자청했다. “개헌 문제로 국론이 분란해서 국민 여러분께 직접 묻겠습니다. 3선 개헌을 위한 국민투표를 실시할 것입니다. 만일 국민이 지지해 주지 않으면 나와 정부는 미련 없이 물러설 것 입니다.” 박 대통령 스스로 개헌을 위한 배수진을 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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