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리아는 결코 낯선 곳이 아니었다. 지평선에서 해가 떠서 지평선으로 지는 곳이 시베리아이지만 여기에도 우리의 숨결이 곳곳에 숨어 있었다.춘원 이광수 선생이 바이칼호 부근에 3년간 살아 ‘유정’이라는 소설의 무대가 됐고, 하바로브스크와 블라디보스토크 등의 연해주 지방과 바이칼호의 관문인 이르쿠츠크는 빼앗긴 나라를 되찾으려던 독립운동의 현장이었다.
연해주에 살던 우리동포(고려인) 17 만여 명이 스탈린의 명령하나로 삶의 터전을 버리고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한 역경의 장소도 시베리아 였다.
시베리아의 가는 곳마다 고려인이 있었고 그들은 조국이 한국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멀리 가면 발해 고토(故土)의 상당부분이 연해주 지방이었고, 조선왕조 북방정책의 목표이기도 했던 곳이 연해주다. 시베리아에서 출토되는 유물은 한반도의 것과 유사성이 많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시베리아는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는 아주 먼 곳이 돼 버렸다. 삭풍이 몰아치는 눈 덮인 동토(凍土)와 유형(流刑)지 정도의 이미지가 고작이었다.
냉전으로 미ㆍ소가 대결하고 분단으로 국토의 허리가 잘려 행동반경이 움츠러든 결과였을 것이다.
1990년 한ㆍ소수교가 이뤄지고 소련이 개방의 길에 접어들었지만 시베리아는 시베리아였다. 소련이 붕괴되고 한ㆍ러 교류가 활성화되면서 시베리아는 어렴풋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간헐적으로 신문에 시베리아 횡단기가 실리고 TV에 이 곳의 풍경이 비치기 시작하면서부터다. 본격적으로 시베리아가 우리와 가까워진 계기는 시베리아 횡단철도(TSR)와 한국철도(TKR) 연결사업이 거론된 2000년 6월의 남북정상회담이다.
‘철의 실크로드“를 만들겠다는 계획 아래 경의선 복원공사가 추진됐고, 남북 주요 현안으로 TSR과 TKR 연결사업이 자리잡았다.
한 여름의 시베리아는 참으로 아름다웠다. 끝없이 펼쳐지는 초원은 푸근하기 그지 없었고, 미인의 자태를 뽐내는 자작나무의 수해(樹海)는 자연이 무엇인지를 웅변으로 보여주었다.
지평선을 차고 오르는 일출과 바이칼호를 솟구치는 태양은 탄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했고, 밤하늘을 수놓은 별무리와 교교하게 빛나는 큰 달은 그 자체가 바로 자연의 교향시였다. 열차가 멈출 때마다 마주친 순박한 표정과 때묻지 않은 사람들의 모습은 이 곳이 사람이 사는 곳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바다보다 넓어 보이는 바이칼호의 위용과 연해주를 감아 도는 아무르강의 자태는 시베리아가 지닌 다양성의 극치였다.
하지만 동족상잔의 비극을 가져온 6ㆍ25의 남침무기 대부분이 시베리아를 거쳐 북한에 왔고, 1983년의 대한한공 007기를 격추시킨 구소련 전투기가 발진한 곳도 이 곳이라는 사실에 생각이 미치면 착잡하기도 했다.
또 냉전시대의 군수공장이 대부분 시베리아 서쪽에 있는 노보시비르스크와 예카톄린부르크에 집중돼있다는 설명도 아름다운 자연의 이면을 되돌아 보게 했다.
이런 시베리아를 한국의 각계인사 300여명이 18량으로 편성된 특별열차를 타고 횡단했다. 한ㆍ러 친선특급이라 이름 붙여진 특별열차는 지난달 16일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 14일 동안 9,939km를 달려 29일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도착했다.
친선특급은 하바로브스크, 이르쿠츠크, 노보시비르스크, 예카톄린부르크, 모스크바,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멈춰 이 지역 인사들과 친선행사를 가졌다. 57명의 대학생들은 이 지역 대학생들과 어울렸고, 기업인들은 설명회와 상담회를 개최했다.
시베리아를 이렇게 대규모 사절단이 횡단하기는 처음이라 했고, 러시아 언론들은 친선특급의 동정을 비중있게 다뤘다.
특히 모스크바 크렘린궁에서 열린 환영만찬에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특별메시지를 보내 주기도 했다.
한ㆍ러 친선특급은 시베리아에서 잃어버렸던 것을 되찾게 해 주었고, 한ㆍ러 양국이 서로를 좀더 이해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이병규 논설위원 veroic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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