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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560)아도르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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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560)아도르노

입력
2002.08.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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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8월6일 독일 철학자 테오도르 비젠그룬트 아도르노가 66세로 작고했다. 그의 죽음은 큰 뉴스가 되지 못했다. 그의 부음을 덮어버린 것은 시끌시끌했던 1968년 5월의 낙진이었다.파리에서 도쿄까지 전세계의 학생들을 역사의 전면에 등장시킨 1968년 사태의 영웅은 아도르노의 프랑크푸르트 학파 동료였던 헤르베르트 마르쿠제였다.

나부끼는 학생 혁명의 깃발 위에는 마르크스와 마오쩌둥(毛澤東)을 잇는 세 번째 M이 선명히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길게 보자면, 그 5월을 무대 뒤에서 이론적으로 원격 조종한 것은 그 ‘5월의 아이들’과의 불화를 뒤로 하고 조용히 죽음을 맞은 아도르노였다.

망명자는 불행의 메신저라는 브레히트의 말이 옳다면, 아도르노는 불행의 메신저였다. 아버지의 유대계 독일 성(姓) 비젠그룬트를 어머니의 이탈리아식 성 아도르노로 위장한 채, 그는 삶의 절정기를 망명자로 살았다.

그러나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곧바로 달이 아니듯, 메신저가 곧바로 메시지인 것은 아니다. 아도르노는 불행을 가리켰을 뿐, 자신이 불행은 아니었다. 그가 가리킨 불행은 인간이 자연에 초래하는 불행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인간이 인간에게 초래하는 불행이었다.

그 엄청난 불행은 아우슈비츠 이후에 서정시를 쓰는 것이 불가능하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왜냐하면 아도르노 생각에 아우슈비츠 이후의 모든 문화는, 그것에 대한 비판까지를 포함해서, 한낱 쓰레기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철학ㆍ미학ㆍ사회과학 분야에서 비판이론을 체계화한 아도르노는 막스 호르크하이머와 함께 프랑크푸르트학파 제1세대를 대표하는 사람이다. 사회과학에서의 실증주의라는 주제로 그가 카를 포퍼와 벌인 유명한 논쟁은 위르겐 하버마스를 통해 이어지며 그와 제2세대 프랑크푸르트학파를 잇는 고리가 되었다.

고종석편집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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