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9ㆍ30일 러시아의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는 한국외교사에 기록될 조촐한 행사가 열렸다. 이범진 주 러시아 공사를 기리는 추모행사 였다.29일에는 추모 학술회의가, 30일에는 구 공사관건물의 현판 부착식과 고인이 잠들어 있는 공동묘지에서의 추모비 제막식이 잇달아 있었다.
■이범진 공사는 러시아 주재 초대 상주공사로 1900년 7월 당시 제정러시아의 수도였던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부임, 1911년 1월 순국ㆍ자결하기 까지 국권수호를 위한 독립외교 투쟁을 전개한 애국열사였다.
그는 구한말 열강의 한반도 각축당시 대표적인 친(親)러인사로 고종의 아관파천(俄館播遷)을 주도한 인물이었다.
1905년 일제가 외교권을 박탈한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하고 각국 주재 대한제국의 외교관을 소환하자 이에 불응,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남아 고종황제의 밀사역할을 하며 국권회복에 나선다. 나라 잃은 외교관으로서 겪었을 간난신고(艱難辛苦)는 상상을 초월했을 것이다.
■이 공사는 을사보호조약후 외교관에서 민족독립운동가가 된다.
1907년 고종황제가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준과 이상설을 밀사로 파견하자 아들 위종을 통역으로 수행케 하고, 러시아 황제에 도움을 청해 밀사일행이 러시아의 보호아래 헤이그에 도착토록 했다.
1908년에는 연해주지방의 항일 민족운동을 적극 지원 했고, 블라디보스토크의 민족신문인 ‘해조신문’ 창간을 후원했다.
당시 연해주 지방의 민족운동을 주도했던 전 간도관리사 이범윤은 6촌 동생이다. 그러나 일제가 대한제국을 합병해 버리자 전재산을 연해주 독립운동에 기증하고 자결, 순국한다.
■추모행사에는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 시베리아(TSR)를 횡단해 14일 동안 9,939㎞를 달려 이곳에 온 한ㆍ러 친선특급 참가자 300여명과 양국관계자등이 참석했다.
고인의 장남 기종씨의 손자 원갑씨 형제와 차남 위종씨의 외손녀 루드밀라 예피모바씨가 흐느낄 때 모두가 눈시울을 적셨다.
서울에서 제작해 가져온 추모비는 한국을 연상케 하는 소나무와 러시아의 상징인 자작나무 사이에 자리 잡았다.
이병규 논설위원 veroica@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