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ㆍ8 항명 사건으로 3선 개헌을 반대해 온 김종필(金鍾泌)계의 목소리는 눈에 띄게 잦아 들었다. 이에 반해 개헌파의 행보에는 상당한 탄력이 붙었다.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측근인 이후락(李厚洛) 비서실장, 김형욱(金炯旭) 중앙정보부장, 길재호(吉在號) 공화당 사무총장, 김성곤(金成坤) 재정위원장, 백남억(白南檍) 정책위의장 등은 개헌 반대 의원들의 각개 격파에 나섰다.
이들은 개인적 친소 관계에 따라 의원들을 따로 만나 개헌 지지를 설득했다. 특히 김형욱 부장은 개헌 반대파 의원들을 갖은 방법으로 회유했고 그것이 안 먹히면 협박도 서슴지 않았다.
이런 바람은 내게도 불어 닥쳤다. 그러나 이미 의원총회 등에서 공개적으로 개헌에 반대하는 등 강경하고 분명한 입장을 표명한 바 있어 그들은 아주 조심스럽게 접근해 왔다.
“이 의원, 개헌 문제 얘기 좀 합시다.” 김성곤 재정위원장이 넌지시 의향을 타진해 왔지만 나는 본론이 나오기도 전에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다음에는 길재호 의원이 나를 두 번이나 찾아 와 마음을 돌릴 것을 종용했다. 나의 대답은 역시 거절이었다.
안되겠다 싶었던지 그들은 내 문제를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에게 미뤘다. “이만섭 의원은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안됩니다. 각하께서 직접 불러서 설득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 이 의원은 내가 한번 불러서 이야기 해 보지.”
아마도 박 대통령은 자기가 직접 설득을 하면 내 마음을 돌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1969년 6월29일은 몹시 무더운 날이었다. 오후 3시쯤 박 대통령이 나를 찾는다는 전갈이 왔다. 나는 청와대에 들어가기 전에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박 대통령이 나를 설득하려 하겠지만 내가 오히려 대통령을 설득해야 겠다”고 다짐을 했다.
나를 맞는 박 대통령의 얼굴은 다소 굳어져 있었다. 차를 권한 박 대통령은 먼저 3선 개헌을 할 수 밖에 없는 당위성을 설명하며 협조를 부탁했다. 나는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5ㆍ16 혁명이 아무리 구국의 혁명이었다 하더라도 무력으로 정권을 잡은 것 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때문에 이 군사혁명을 국민혁명으로 승화시키기 위해서는 대통령께서 직접 만든 헌법을 스스로 지켜서 평화적으로 정권을 이양해야 합니다. 그것이 순리입니다.”
박 대통령은 묵묵히 내 말을 듣기만 했다. 나는 말을 이었다. “4ㆍ19 때 저는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로서 역사의 현장을 생생하게 지켜 봤습니다.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이 장기집권을 함으로써 학생혁명을 유발했습니다. 끝내는 학생들이 이 박사의 동상을 넘어뜨리고 새끼줄로 묶은 채 광화문 거리를 끌고 돌아 다니는 것을 제 눈으로 똑똑히 봤습니다.”
“각하도 장기 집권을 하게 되면 나중에 국민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는 말을 에둘러 한 것이었다. 나로서는 하고 싶은 말을 다했다. 그제서야 박 대통령이 입을 열었다. “내가 나서지 않으면 정권을 야당에게 빼앗기고 말텐데….”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받았다. “그건 그렇지 않습니다. 각하께서 물러 나시면서 ‘내가 못 다한 일을 바로 이 사람, 내 후계자에게 맡겨 주십시오’라고 국민에게 한 말씀만 하신다면, 그 사람은 틀림없이 당선됩니다.”
“그렇다면 후계자가 될 사람은 있는가?” “각하께서 김종필씨가 내키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 이효상(李孝祥)씨나 백남억(白南檍)씨 같은 분도 좋지 않습니까. 그 분들 중 한 분에게 4년을 맡긴 뒤 다시 정권을 잡으면 되지 않습니까.”
지리하게 평행선을 달리던 대화는 마침내 벼랑 끝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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