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게는 누구나 잊지 못할 일들이 있다. 나에게도 매년 이맘 때 무더운 날씨가 이어지면 생각나는, 어머니와 관계되는 내 평생 잊지 못할 일이 있다.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이었다. 그때 난 어머니와 함께 고향에서 160㎞를 걸어서 논산훈련소에서 훈련을 받고 있는 형을 면회간 일이 있다. 어머니는 초등학교 4학년인 나에게 반드시 동행해야 하는 세가지 이유가 있다며 굳이 손을 잡고 나섰다.
우선 1904년에 태어난 어머니는 글과 숫자를 읽을 수 없어 길 가에 있는 길안내 표지판을 내가 대신 읽어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둘째는 당시 군에 입대하면 거의 대부분이 전사하기 때문에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형의 모습을 꼭 보아 두어야 한다는 게 어머니의 뜻이었다.
셋째는 면회 가서 형의 밥을 해주고 와야 하는데 그 짐을 어머니 혼자 다 가져갈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어렵사리 장만한 음식과 쌀, 땔나무 조각을 머리 위에 한아름 얹고 구슬 같은 땀을 흘리며, 그 먼 자갈길을 짚신에 의지하여 걸어가는 어머니의 뒷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이 글을 읽는 부모나 청소년들은 ‘소설 같은 이야기’라며 믿지 않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1940년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하며 어린 시절을 지내던 나는 그날 기차요금이 없어 나흘간 400리 길을 걸어가는 어머니를 말없이 따랐다.
나에게 조그만 보퉁이 하나 맡기지 않고 홀로 그 많은 짐을 이고 가는 어머니를 따라가면서 나는 ‘힘들다’는 말 한마디 할 수가 없었다.
오직 순수한 자식사랑과 모성애가 아니라면 그 무엇이 당신을 그곳까지 이끌고 갈 수 있었을까. 자식들 때문에 결국 한쪽 눈까지 실명한 어머님이 아니었던가.
이 세상 모든 이가 다 그러하듯 나는 어머니를 가장 존경한다. 어머니의 지극한 사랑을 영원히 마음 속에 간직하고자 난 나의 책 머리말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어머니! 허구한 날 자식의 앞날을 염려하시며 사셨던 어머니, 94세로 돌아가실 때까지 자식 걱정에서 벗어나지 못하셨던 건 아니었는지요. 이제 모든 짐들 다 내려 놓으시고 가벼운 걸음으로 가셨는지요. 평생동안 자식을 위하여 고생하신 어머님께 작은 보답으로나마 이 책을 바칩니다.”
/권이종 한국청소년개발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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