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무 것도 원하지 않는다. 나는 아무 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악기를 연주하는데 거추장스럽다면서 새끼손가락을 잘라버린 그의 소설 속 주인공 조르바처럼 니코스 카잔차키스(1885~1957ㆍ사진)는 자유로웠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작가 카잔차키스가 지은 ‘카잔차키스의 천상의 두 나라’(예담출판사 발행)는 모든 감각을 동원해 체험한 이국에 대한 기록이다.
카잔차키스는 1935년 중국과 일본을 방문했고 3년 뒤 여행기를 썼다. 그리스인인 그의 작품에 드리워진 동양사상의 뿌리를 찾아볼 수 있는 글이기도 하다.
카잔차키스는 서양인이었지만 세계의 중심에 선 나라의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 그가 50세에 찾은 극동의 두 나라는 모순과 신비가 공존하는 곳이었다.
중국에서 카잔차키스는 15년 된 썩은 오리알과 거북의 발로 만든 수프를 앞에 놓고 두려움을 느끼고, 전족 때문에 기형적으로 작은 발을 갖게 된 여자들을 보고 혐오감에 몸을 떤다.
누더기를 걸친 아이들이 뛰어다니는 더러운 뒷골목, 비인간적 현실의 축소판인 홍등가의 소음과 악취를 못 견뎌하면서도 그는 낯선 나라가 자신의 영혼을 기름지게 하는 것을 느낀다.
일본 땅을 밟은 그는 눈처럼 흩날리는 벚꽃 속에서 대포의 이미지를, 기모노로 감싼 관능적인 여체에서 칼의 이미지를 본다. 매혹적인 일본 연극 가부키, 인공적인 아름다움으로 가득찬 정원, 침묵과 사색의 의식인 다도(茶道)가 그를 강렬하게 사로잡는다.
놀라운 것은 미래를 보는 작가의 눈이다. “5억 명의 중국인이 막대기와 녹슨 칼 대신 탱크와 비행기로 무장해 세상을 바꿔놓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일본인이 미래의 검은 광기에 걸려 탱크와 비행기와 군인들로 무장할지도 모른다.” 그는 천상의 두 제국 안에서 잠자고 있는 광기를 발견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이제 중국과 일본이 새로운 르네상스의 장이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카잔차키스의 예언은 들어맞았다. 그가 한국을 보았더라면 무슨 기록을 남겼을까. 소설가 정영문씨가 1982년 영역판을 우리말로 옮겼다.
김지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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