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에 저장된 정보를 빼내는 것은 현행법상 절도행위에 해당하지 않아 처벌할 수 없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이는 정보화 사회에서 갈수록 그 의미가 커지고 있는 컴퓨터 저장정보의 재산적 가치를 정면으로 부인한 것이어서 큰 파장이 예상된다. 법조계에서는 이번 판결에 대해 “실정법이 급속한 정보통신의 발달을 미처 따라가지 못하는 대표적 사례”라며 조속한 법적 보완을 촉구했다.
◆판결내용
대법원 3부(주심 윤재식ㆍ尹載植 대법관)는 12일 기업체의 컴퓨터에 저장된 설계도면을 훔친 혐의로 기소된 H사 연구개발부장 지모(42)씨와 공범 김모(51)씨에 대해 유죄를 선고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수원지법으로 돌려보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절도죄가 성립하려면 훔친 대상이 유체물(有體物)이거나 전기에너지처럼 관리 가능한 동력(動力) 등의 재물이어야 하는데 컴퓨터에 저장된 정보 자체는 재물에 해당하지 않는만큼 정보를 훔친 행위를 절도죄로 처벌할 수 없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또 “이런 정보를 복사, 출력했다 해도 피해자측에서 볼 때 정보가 없어지거나 이용가능성을 감소시키는 것이 아닌 한 역시 절도죄를 구성한다고 볼 수 없다”고 덧붙였다.
지씨는 퇴직 임원인 김씨의 요구에 따라 2000년 10월 회사 연구개발실에서 노트북 컴퓨터에 저장된 직물원단 고무코팅시스템의 설계도면을 A2지 2장에 출력해 빼낸 혐의로 김씨와 함께 기소돼 1, 2심에서 징역8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당시 재판부는 “피고인들이 훔친 시스템 설계도면은 회사가 독자적으로 개발한 ‘재물’로 판단된다”고 유죄선고 이유를 밝혔다.
◆법조계 반응
법조계에서는 이러한 정보절도 행위에 대해 처벌규정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연세대 박상기(朴相基ㆍ법학) 교수는 “정보는 현실적으로 일반 재물보다 더 중요할 수 있는만큼 개인의 정보보호를 실정법이 포괄할 수 있도록 형법을 개정할 필요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박 교수는 이어 “일반적인 ‘정보’ 개념은 너무나 추상적이므로 예컨대 ‘전자기록장치에 의한 기록’을 절도죄의 객체인 재물의 범위에 포함시키는 등의 입법을 생각해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최재천(崔載千) 변호사도 “현재 산업스파이를 막기위한 부정경쟁방지법은 영업비밀에 해당하는 정보를 제3자에게 누설하는 행위를 처벌하는 것이어서 정보절도 자체를 규제하지는 못한다”며 “해킹 처벌조항인 형법상 비밀침해죄도 정보의 재산적 가치를 무시한 채 비밀침해 측면에서만 접근하는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최 변호사는 “현실사회에서 정보의 재물성이 점차 강조되고 있어 이를 침해하는 행위는 적절히 규제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손석민기자 hermes@hk.co.kr
노원명기자 narzi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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