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늘 파동이 작은 소용돌이라면 쌀 문제는 거대한 태풍이다. 만약 마늘처럼 근본적 문제해결을 미룬 채 시간만 보내는 실수를 되풀이 한다면 쌀문제는 파동 정도가 아니라 국민경제적 재앙이 될 것이다”2004년 쌀 개방 재협상을 앞두고 미국 등의 전면개방 압력이 거세지고 있으나 이에 대한 범정부 차원의 대응전략이 마련되지 않아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정부는 쌀 개방에 대한 장기적인 대응책을 준비하기 보다는 넘쳐 나는 쌀 재고 처리에도 급급한 실정이다. 위기에 처한 쌀농사의 현실과 전망을 진단해본다./편집자주.
▼개방8년, 넘쳐나는 쌀창고
1993년 말 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 타결 이후 정부가 수립한 개방대응 전략은 쌀값 하향안정을 통한 감산유도였다. 하지만 이 원칙은 농민의 거센 반발과 정치권의 선심정책에 밀려 수포로 돌아갔다.
UR 직후인 94년과 95년, 97년 3차례 동결했던 추곡수매가는 현 정부가 들어선 98년 이후 평균 26.4%가 올랐다. 일본은 수매가를 94년 이후 10.3%, 중국은 97년 이후 21%를 내려 일찌감치 쌀 시장개방에 대비했고, 대만은 동결했다.
그 결과 지난 해 우리나라 쌀 수매가는 미국산의 4.8배, 중국산의 5.8배, 태국산의 8.1배에 달했다. 재배면적도 되래 늘었다. 수매가가 오르고 논농업직불제가 시행되면서 채소ㆍ과일농가들이 논으로 눈을 돌렸기 때문이다.
97년 105만2,000㏊였던 재배면적은 지난 해 108만3,000㏊에 이르렀다. UR논의가 본격화하던 92년 이후 지난 해 까지 10년간 농어촌구조개선사업에 투입된 예산은 국고 58조원을 포함, 총 76조여원. 하지만 묵은 쌀을 보관할 창고조차 모자라 400만석을 사료용으로 특별처분하기로 하는 기막힌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주어진 시간은 이제 2년
하지만 재고 쌀 문제는 쌀 산업 파행의 작은 증상일 뿐 병원(病源)은 아니다. 당장 꺼야 할 발 등의 불은 2004년 판가름 나는 쌀 시장 전면개방(관세화) 시나리오에 대한 대책이다. 농업문제에 관한 한 전통적인 아군인 일본은 94년4월 일찌감치 관세화로 등을 돌렸고, 이스라엘과 중국도 2000년, 2001년 관세화를 선언했다.
올해 협상에 나설 예정인 대만 역시 관세화 동조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 사실상 유일한 비관세화 국가인 우리나라에 대한 압박은 더욱 거셀 전망이다. 농촌경제연구원 박동규 박사는 “2005년 이후 관세화 유예를 인정받으려면 수출국에 의무수입물량(MMA)을 파격적으로 늘리거나 별도의 품목을 양보할 수 밖에 없고, 이는 국내 농업 구조조정을 지연시키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지난 달 말 일본에서 폐막된 5개국 농업장관회담에서 미국이 제시한 쌀의 농산물 일괄협상안과 관세율 25%이하 인하안(한국 평균관세율 60%)이나 국내 보조금의 농업생산액 5%이내 억제요구 등은 내년 중 확정될 관세 감축율과 보조금(AMS)의 감축 폭이 훨씬 가혹한 수준이 될 것임을 예고한다.
쌀 생산단가와 쌀값이 국제 수준보다 최고 7배 이상 높은 국내 쌀 농가의 위기를 어떻게 넘기느냐는 향후 2년의 뼈를 깎는 구조조정 성과에 달려 있다.
장기 대책이 시급하다
정부대책은 ‘충격 완화’즉 개방(혹은 의무수입물량 확대) 이후 농가소득 감소와 과잉생산 문제에 대한 해법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다. 정부가 올해부터 도입키로 한 소득보전직불제도 역시 기존 논농업직불제의 보완책인 셈.
최근 연구용역팀의 논의도 일본식 소득보전직불제, 즉 올해 농가 조수입이 직전 3개년 간의 평균 조수입(생산량X가격)의 70%에 못 미칠 경우 70% 한도내에서 차액을 보전하는 데 맞춰져 있다. 보험형태의 보완책도 검토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희망농가에 한해 쌀값 충격에 대비해 얼마간의 보험금을 납입토록 해 현실적인 소득보전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하겠다는 조치다. 하지만 일본식 소득보전직불제의 경우 시행 초기에는 효과가 있지만 가격이 매년 속락할 경우 기준가격이 갈수록 낮아져 실효를 거두기 힘들다는 점이 문제점. 지난해 일본의 경우도 기준 시점을 과거로 소급해 소득 보전 폭을 늘리는 편법을 동원했다. 소득보전보험은 개별 농가의 생산량 등 보험금 지급에 필요한 통계 실사 인프라가 부실한 데다 소득보전 재원의 일부를 농민에게 부담시키는 것인 만큼 상당한 진통이 예상된다.
하지만 정부 대책논의의 가장 큰 문제점은 과거 농정이 그랬듯이 쌀 산업과 농업전반에 대한 장기 청사진이 부실하다는 점이다.
충남대 박진도(朴珍道) 교수는 “10년, 20년 뒤 쌀 자급률 목표와 이를 위해 확보할 쌀 최소 생산기반 전략 등 장기전략과 비전이 국가 경제와 식량안보, 환경 등 총체적 관점에서 시급히 검토돼야 한다”며 “하지만 이런 장기 과제는 눈 앞의 난제에 밀려 외면당하기 일쑤였다”고 말했다.
■2004년 협상 예고된 시련/관세화 유예도 능사도 아니다
1993년 말 우루과이라운드(UR) 타결 당시 한국의 쌀 시장은 WTO회원국 중 유일하게 개방원칙의 예외를 인정받았다. 국내 쌀 소비량의 4% 한도내에서 외국 쌀을 의무적으로 수입(MMAㆍ최소시장접근물량)하는 조건으로 시장 개방을 10년간 늦춘 것이다.
그 시한이 내년 말로 만료되고 당시 합의에 따라 개방 유예를 연장할 지, 관세만 물리고 시장을 개방할 지 2004년 중 재협상해야 한다. 하지만 이 협상에서 우리의 입지는 극히 좁은 실정이다.
우리 정부의 협상 방향은 관세화(시장 개방)를 선택했을 때 예상되는 수입 물량과 관세화 유예를 연장받기 위해 양보해야 할 MMA물량을 저울질해 가벼운 쪽이 될 수 밖에 없다. 관세화 유예 연장을 위해서는 ‘이해당사국이 수락 가능한 양허를 제공해야 한다’는 UR 합의 부속서 조항에 따라 쌀 수출국이 만족할 만한 양을 의무적으로 수입해줘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산술적으로 보더라도 관세화 유예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의미다. 만일 개방도 안하고, MMA물량도 최소화하려다 협상이 결렬되면 10년간의 예외 ‘혜택’에 따른 패널티로 그 책임은 전적으로 우리 정부가 지게 되며, 이는 곧 시장개방을 의미한다.
반면에 만일 정부가 관세화를 수용키로 방침을 정한다면 2004년 재협상은 취소된다. 1999년4월 일본 쌀 관세화의 경우처럼 WTO에 관세화 전환사실과 관세율을 통보하고, 이해관계국과 개별 협상만 벌이면 되기 때문이다. 이때부터는 관세율을 최대한 높여야 하는 우리 정부와 최대한 낮추려는 수출국간의 줄다리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서울대 정영일교수 "해법은 시장원리서 찾아야"
“쌀 문제의 핵심은 시장원리가 철저히 무시됐다는 점이며, 해법 역시 시장원리에서 찾아야 합니다.”
서울대 정영일(鄭英一ㆍ경제학ㆍ사진) 교수는 “쌀의 과잉생산과 수급불균형 사태는 정부가 경제의 기본인 수요ㆍ공급의 원칙을 왜곡시켜 온 데서 비롯됐다”며 “이제 쌀도 하나의 상품으로 접근해야 할 때가 왔다”고 말했다.
정교수는 농촌경제연구원장과 양곡유통위원장을 지낸 국내 대표적인 농업문제 전문가. 그는 “올해 재고쌀을 특별처분했지만 현 상황이라면 매년 300만~400만석의 재고가 쌓일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도 쌀의 특수성, 즉 전체 농업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환경ㆍ식량안보 차원의 중요성을 인정했다. 정 교수는 “시장화의 충격은 정부가 최근 50년간 일관되게 추진했던 가격정책(추곡수매)이 아니라 소득ㆍ경영 안정화 정책을 통해 완화해야 한다”며 “이런 측면에서 최근 정부와 농특위의 문제 접근 방식은 바람직하다”고 덧붙였다.
그는 그러나 “쌀 가격은 철저히 시장상황에 맡겨야 한다”며 “쌀 농업 지원대상도 규모화 한 전업농에 맞춰져야 하며, 자급자족적 영세농가에 대한 지원은 재고돼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와 농특위가 검토중인 보험식 소득보전제에 대해서는 “보험제가 되려면 개별 농가에 대한 경영데이터가 확보돼 있어야 하는 데 상당수 농가가 소득 신고조차 않고 있고, 사전조사도 미흡한 상황”이라며 당장 도입하는 것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피력했다.
정부의 쌀 농업 대책과 관련 그는 “모든 정부 대책이 농민을 달래는 데 초점을 맞추면서 구조조정에 대한 장기적인 전략이 없었다”며 “2004년 쌀 재협상 전략도 단기 충격의 정도와 함께 장기적 체질강화에 유리한 것이 무엇인지 검토한 뒤 수립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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