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40년 정치 인생, 아니 70 평생을 통틀어 가장 치열하게 살았던 때가 언제였느냐고 누가 물으면 나는 주저 없이 재선의원 시절을 꼽는다.30대 중반의 열정에 내 몸과 마음은 늘 뜨겁게 달아 올라 있었다. 정치권에 들어 오면서 품은 ‘바른 정치를 하겠다’는 꿈은 언제나 가슴 한 쪽에서 꿈틀댔다.
소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 무엇도 두려워 하지 않겠다고 밤마다 스스로에게 다짐을 하던 시절이기도 했다.
때로는 목숨에 위협을 느끼면서도 올바른 길을 가고자 최선을 다했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 시절은 치열했던 만큼 자랑스럽고 아름다웠다.
권력의 서슬이 시퍼렇던 1969년 나는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에게 정면으로 반기를 들었다. 3선 개헌 때문이다.
박 대통령은 ‘조국 근대화의 완성’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집권 연장을 꾀했고, 나는 ‘민주주의를 지켜야 한다’는 소신에서 이에 반대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었지만 나는 목숨을 걸고서라도 소신을 지키려 했다.
1969년 1월. 길재호(吉在號) 사무총장, 윤치영(尹致暎) 의장서리 등이 개헌 군불 때기를 시작했다. “조국 근대화를 위해서는 강력한 정치적 리더십이 필요합니다. 이 지상명제를 위해서는 대통령 연임 조항을 포함한 현행 헌법의 문제점을 바로잡는 연구가 필요합니다.”
박 대통령은 1월10일 연두 기자회견에서 이에 언급했다.
“헌법을 개정할 필요가 있더라도 지금 왈가왈부할 게 아니라 금년만큼은 온 국민이 힘을 합쳐 공산당과 대결하고 경제건설을 해야 하며, 이러한 문제가 꼭 논의돼야 한다면 금년 말이나 내년 초쯤 가서 논의해도 시기적으로 늦지 않을 것입니다.” 언뜻 개헌 반대론인 듯했지만 새겨 들으면 개헌에 적극성을 내비친 발언이었다.
야당은 즉각 반발했다. 새해 벽두부터 정가에 파문이 일기 시작했다.
“나는 당의 운명을 걸고 대통령 3선 개헌을 저지할 것입니다.” 신민당 유진오(兪鎭午) 총재가 총력 투쟁을 선언하는 등 정국은 개헌 소용돌이에 빠져 들었다.
한달 뒤 박 대통령은 한발 물러 섰다. “본인 임기 중에 현행 헌법을 고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며 지금은 경제 건설이 시급하니 앞으로 개헌 문제를 더 이상 거론하지 말기 바랍니다.”
그러나 불과 보름 뒤 윤치영 의장서리가 개헌론을 다시 끄집어 냈다. “정세에 따라서는 개헌도 가능하지 않겠는가.”
당정간에 물밑 조율이 있었던 것이다. 여론의 향배를 지켜 보며 한쪽에서는 거부하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찬성하는 양동 작전이었다.
나는 개헌에 절대 반대였다. 이유는 단 하나, 정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공화당에는 나처럼 순수하게 개헌에 반대하는 의원들도 여럿 있었다.
이른바 JP계도 개헌반대 세력이었다. 당내 의견이 양분된 가운데 3월6일에 의원총회가 열렸다. 윤치영 의장서리가 인사말에서 개헌 문제를 거론하면서 자연스럽게 토론이 벌어졌다. 개헌 문제가 공식석상에서 논의되는 게 처음이었기에 모두들 조심스러워 했다.
그러나 평소에 직선적이고 바른말을 잘하던 의원들은 이날도 개헌 반대 주장을 주저하지 않았다. 양순직(楊淳稙) 박종태(朴鍾泰) 신윤창(申允昌) 정간용(鄭幹鎔) 의원 등이 주로 개헌 반대론을 폈고 나도 서슴없이 내 의견을 밝혔다.
“박 대통령의 조국 근대화 업적은 국민들도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국민 어느 누구도 개헌을 하면서까지 정권을 연장하는 것은 원하지 않습니다. 지금 이 헌법은 우리 손으로 만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지켜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결국 그날 의원총회는 격론 끝에 결론 없이 마쳤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지나지 않았다. 그로부터 한달 뒤 본격적인 개헌 국면으로 접어 드는데 그 계기는 다름 아닌 4ㆍ8 항명 파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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