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에 대해 문외한인 나는 얼마 전 경제학을 전공한 친구와 술을 한 잔 하는 자리에서 한 가지 질문을 해보았다.우리가 마시고 있는 이 술이며 안주가 소위 GDP니 경제성장률이니 하는 지표에 포함이 되느냐는 것이었다. 질문이 너무 해괴했던지 그는 왜 그런 것을 묻느냐며 오히려 그 의도를 더 궁금해 했는데 결국 답변은 당연히 포함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것저것 인생살이의 재화며 유통에 관한 사항 몇 가지를 더 물어보았더니 다 마찬가지라는 대답이었다.
나 같은 사람이 부질없이 술과 안주를 축 내고 있는 것도 저 국가적 지표에 계상된다 하니 어쩌면 신기하기도 하고 영광스럽기도 하련만 그로 인해 술 맛이 나아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경제활동 전반에 관한 그간의 막연하면서도 어두운 예감이 더 깊이 드리워지는 느낌이었다.
지난 40년의 세월 동안 우리는 국민총생산, 경제성장률, 경상수지 등을 국가 운영의 가장 중요한 지표로 삼아 왔고 또 그 지표들을 통해 세계사의 판도에서 우리의 위상을 가늠해 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바로 그 지표라는 것이 경제활동의 외적 물동량 비슷한 것이어서 그 질과 내용 여하를 결코 물어보지 않는 양적 지표들이라는 것이 나 같은 경제 문외한이 보기에도 매우 기이해 보였던 것이다.
‘무엇을’ 생산하고 ‘어떻게’ 소비하느냐 하는 문제는 어디에 있는지, 혹은 그런 문제는 나처럼 경제를 모르는 사람에게나 문제가 되지 본질적으로는 문제가 될 수 없는 것인지, 자못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경상수지가 흑자냐 적자냐를 떠나 방학만 되면 바퀴 달린 가방을 요란하게 끌고 인천공항을 빠져나가는 저 무수한 사람들의 욕망은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지, 우리의 욕망은 우리 삶의 인간다움에 얼마나 견실하게 이어져 있는지 하는 의문은 느리기는 하지만 이미 저항할 수 없는 힘으로 우리 의식의 지평에 떠오르고 있다.
돌아보면 물자를 아낄 줄 모르는 태도는 거의 일상화되어 어떨 땐 그 맹렬함이 온전히 물자에 대한 모욕과 학대의 수준에 이르고 있다.
반도의 한 쪽은 전력이 모자라 기초 산업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한다는데 이 쪽은 빈 방에 환하게 불을 밝히고도 별로 죄책감을 갖지 않는다. 음식 쓰레기는 GDP의 2%라는 설도 있고 3%라는 설도 있다.
끊임없이 냉장고 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는 개인의 욕망처럼 국가 경제를 뒷받침하는 우리의 집단적 욕망은 정처도 없고 한도도 없는 것 같다.
하반기 경제성장률이 당초보다 다소 상향 조정될 것이라는 긍정적 보도를 접하고도 우리의 마음은 전처럼 가볍지가 않다.
그것은 우리가 달리지 않으면 쓰러지고 마는, 세계 경제라는 이름의 매우 불행한 자전거를 타고 있다는 사실을 점점 깨달아 가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국부는 더 이상 커지는 것이 위험스러울 정도로 커졌지만 우리 삶의 근본 모습은 여전히 고달프고 각박하다. 그래도 경제적 지표들은 욕구불만과 뒤엉킨 엄청난 허욕의 부피를 이끌고 오늘도 모호한 항해를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생각할 때 우리도 이제는 국민총생산이나 경제성장률 같은 지표가 우리의 조화로운 삶, 인간다운 삶에 얼마나 상관되어 있는가 하는 새로운 문제를 심각히 생각할 때가 되지 않았나 한다.
그리고 그런 고민을 통해 그 상관 정도를 말해주는 ‘인간계수(人間係數)’ 같은 것이라도 계발되었으면 하는 뜬금 없는 생각도 해본다.
온 국민이 기왕의 경제 지표들을 넘어 그런 계수와 그런 계수가 가리키는 삶의 내용에 더 진지해질 때, 현재의 편협하고 맹목적인 경제관도 ‘경세제민(經世濟民)’이라는 본래의 형안을 다시 회복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이수태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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