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닉스 반도체의 운명을 결정지을 도이체방크의 실사결과 발표가 임박한 가운데 하이닉스의 대주주인 채권단이 ‘선(先) 사업분할’원칙을 포기하겠다고 전격 선언하고 나섰다.이는 하이닉스를 우량사업과 비우량사업으로 쪼갠 뒤 사업부문별로 해외매각을 재추진하겠다던 기존 입장에서 크게 후퇴, 결과적으로 하이닉스의 독자생존론에 힘을 실어주는 것이어서 귀추가 주목된다.
하이닉스 채권단 고위관계자는 31일 “도이체방크의 실사결과가 어떤 방향으로 나오더라도 당장 사업분할을 실행하지는 않을 계획”이라며 “인위적으로 사업을 분할하면 회사 전체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역효과를 낼 수도 있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매각과 사업분할을 동시에 진행하는 쪽으로 입장을 바꾸었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현재 하이닉스가 메모리, 비메모리 등 주요사업 부문별로 사실상 분리 운영되는 형태이기 때문에 굳이 사업을 조각조각 나누어 독립법인화하는 것은 큰 실효가 없다는 판단”이라며 “비영업부문 부동산 처분 등 하이닉스 자체의 자구계획을 예정대로 진행하면서 추후에 하이닉스에 대한 원매자가 나타나면 그때 가서 원매자의 구미에 맞게 분할을 해도 늦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채권단의 이 같은 방침은 미국 마이크론 테크놀로지와의 매각협상 무산 이후 강도높은 구조조정(사업분할)을 우선 단행한 뒤 매각작업을 강행하려던 ‘선 분할 후 매각’원칙을 사실상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또한 해외매각을 유일한 대안으로 설정, 매각 재추진을 위해 대주주 지분(67%)까지 확보한 채권단으로선 엄청난 입장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채권단은 도이체방크의 실사를 통해 하이닉스를 ▲ 우량사업(굿 컴퍼니)과 ▲ 비우량사업(배드 컴퍼니)으로 분할한다는 구조조정 방안을 마련, 하이닉스 이사회의 승인까지 받은 상태다.
채권단 주변에서는 도이체방크가 2개월 여의 실사를 통해 ▲ 메모리 ▲ 비메모리 ▲ 초박막액정표시장치(TFT-LCD) ▲ 기타 비영업부문 등 크게 4개 부문으로 분할하는 안을 제시할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채권단이 사업분할 계획을 철회한 만큼 도이체방크의 실사결과와는 무관하게 하이닉스는 현행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게 돼 특별한 유동성 위기에 봉착하지 않는 한 ‘독자생존론’에 더욱 힘이 실릴 전망이다.
이와 관련, 그동안 독자생존 불가론을 고수해온 이근영 금감위원장도 29일 국회에서 “독자생존을 포함해 하이닉스에 대한 처리방안을 원점에서 재검토하고 있다”고 발언, 정부와 채권단 사이에 모종의 교감이 있었던 게 아니냐는 추측이 일고 있다.
채권단이 이처럼 입장을 급선회하게 된 것은 기본적으로 해외매각 추진이 단시일 내에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유일한 인수후보로 거론돼 온 마이크론의 주가가 미국 금융시장 불안의 여파로 최근 들어 20달러 대로 떨어져 인수여력이 사실상 사라진 것이 무엇보다 큰 요인이다.
더구나 반도체 가격의 안정으로 당분간 하이닉스의 현금흐름에 큰 문제가 없다는 것도 어느 정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채권단 관계자는 “128메가D램 가격이 3달러 안팎인 현 수준만 유지한다면 적어도 내년 말까지는 유동성 문제는 재발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며 “대통령 선거 등 외부요인도 많아 하이닉스 처리가 장기화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변형섭기자 hispeed@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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