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무트 콜 전 독일 총리가 1998년 퇴진한 뒤 재임 중 엄청난 비자금을 주무른 사실이 드러나자, 언론은 ‘거인은 그림자도 크다’고 평했다.통일 위업을 이룬 정치적 거인의 위상에 가려졌던 비리의 중대함을 그의 코끼리 같은 거구에 빗댄 비유였다.
콜은 비자금을 옛 동독 민주세력 지원 등 통일 과정에 썼을 뿐, 개인적으로 유용하지는 않았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독일 사회는 뛰어난 정략과 생존 능력으로 16년 간 총리 자리에 머문 인물의 부도덕성을 뒤늦게나마 심판했다.
초대 통일 총리의 상징성을 고려해 미뤘던 총리직 정화(淨化) 작업을 정치권이 암묵적 합의로 단행했다는 추측이 뒤따랐다.
독일 정치도 그 사회 통념으로는 어느 분야보다 음습하다. 그래서 독일인들에게 가장 큰 모욕은 제국주의 시절에는 ‘비겁자’, 냉전시대에는 ‘빨갱이’, 그리고 오늘날은 ‘정치인’으로 지칭하는 것이란 만평이 등장한다.
그러나 독일 정치가 우리와 비교할 수 없는 도덕적 수준을 유지하는 것은 권좌에서 물러난 거물 총리를 심판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끊임없이 자정(自淨) 노력을 기울이는 덕분일 것이다. 우리 기준으로는 별 것 아닌 비리 의혹도 가차없이 파헤쳐 총리 후보 등 유력 정치인을 정계에서 내쫓는 관행이 확고하다.
최근 슈뢰더 총리의 사민당 정부는 샤르핑 국방장관이 자서전 저작권 선금 명목으로 수천 만원을 받은 스캔들이 불거지자 그를 해임했다.
샤르핑은 93년 총선 때 사민당수겸 총리 후보로 콜과 대결한 거물이다. 그러나 슈뢰더 총리는 “정부에서 함께 일할 도덕성의 기반이 없어졌다”고 샤르핑의 정치 생명 자체가 끝났음을 선언했다.
그 슈뢰더 총리는 화려한 정치 이력에도 불구하고 고향 집과 베를린의 월세 70만원짜리 작은 아파트를 함께 유지할 여력이 없어 최근 고향 집 살림을 베를린 아파트로 합쳤다고 해서 화제가 됐다.
3차례 이혼으로 모은 재산이 없다는 뒷얘기지만, 총리로 입신하는 데는 그만한 절제의 미덕이 떠받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오욕을 안고 퇴장한 콜 전 총리도 개인적 치부의 의혹과 흔적은 없었다.
독일 정치의 자정 노력을 상징하는 것은 명목상 국가 원수인 대통령에 도덕성이 뛰어난 정치인이나 명망가를 추대하는 관행이다.
독일 대통령은 정치적 서열에서 총리와 외무장관에 이어 3위 정도로 꼽힌다. 그러나 현실 정치의 어두운 수렁에 발 담근 여느 정치인과 달리 정파를 초월한 존재로 처신, 사회 전체에 도덕적 지침을 제시하는 정신적 지도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우리 국무총리의 위상을 독일 총리나 대통령의 그 것과 비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역대 권위주의 정권이 취약한 정통성을 보완하기 위해 학계와 재야의 도덕성 높은 명망가를 총리로 힘써 영입한 전례에서 보듯이, 후진적이고 타락한 정치 현실에서 그나마 정부의 도덕적 권위를 지키는 역할을 할 수 있는 자리다. 실권이 없기에 오히려 상징으로 기능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총리 자리에 가뜩이나 대통령 아들 비리로 도덕적 파탄 위기에 처한 정권이 도덕성이 검증되지 않은 인물을 지명한 것부터 무모한 실책이다.
그 총리 후보는 ‘첫 여성 총리’란 상징적 자산을 가졌지만, 무엇보다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거듭된 위장 전입 책임을 치매 상태인 시어머니에게 미루는 파렴치한 배덕(背德)마저 감행하며 여성을 포함한 온 국민을 능멸했다.
현실의 모든 이익과 지위를 이악스레 좇은 수완이 두드러질 뿐인 인물을 배척한 것을 여성 차별이나 정략 차원에서 다시 논란하지 않았으면 한다.
부도덕하고 타락한 정치판에 그야말로 소시민보다 도덕적 인식이 없는 이가 당당하게 새로 진입하는 사태를 막은 것은 정치가 최소한의 자정력을 보인 것이다.
국회가 대변한 여론의 준엄한 심판을 가혹하게 여길 때가 아니다. 국민의 상한 감정을 어루만질 수 있는 새 총리를 찾는데 정치권이 힘을 모으기 바란다.
/강병태 편집국 부국장 bt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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