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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555)조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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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555)조레스

입력
2002.07.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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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7월31일 프랑스의 정치가 장 조레스가 파리에서 암살당했다. 55세였다. 이 반전(反戰) 사회주의자를 암살한 사람은 29세의 광신적 민족주의자 라울 빌랭이었다.조레스는 당시 프랑스 정부가 외교ㆍ군사적 동맹체제로 구축한 프랑스ㆍ영국ㆍ러시아 사이의 삼국협상에 반대하고, 프랑스와 독일의 반(反)제국주의 세력이 힘을 모아 유럽의 평화를 구축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1870~71년의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굴욕적으로 패배한 뒤 독일인들에게 깊은 원한을 갖고 복수의 기회만 노리던 프랑스 민족주의자들에게 그는 눈엣가시였다.

조레스가 암살되고 사흘 뒤, 독일과 프랑스는 제1차 세계대전이라고 불리게 될 참혹한 전쟁에 돌입했다.

조레스는 프랑스 제3공화국의 사회주의 운동과 정치를 이끈 인물이다. 1904년, 뒷날 프랑스 공산당의 기관지가 될 사회주의 신문 ‘뤼마니테’를 창간한 것이 조레스이고, 그 이듬해 여러 경향의 사회주의자들을 통합해 노동자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프랑스 사회당의 전신)를 건설한 것도 그다.

그러나 그는 계급 투쟁이 역사 발전의 추진력이라는 마르크스의 견해에 동의하면서도, 이상주의적 열정을 조절해 폭력을 최소화하고 사회를 점진적으로 개선할 수 있다고 믿었다. 조레스는 늘 국가이성보다는 개인의 권익을 우위에 두었다.

무소속 의원으로 정치 생활을 시작한 그가 처음 가입한 정당도 프랑스 사회주의 정당들 가운데 가장 온건했던 독립사회당이었다.

프랑스 지식인의 산실로 불리는 파리 고등사범학교 출신의 조레스는 프랑스에서 ‘지식인의 집단적 탄생’을 알린 드레퓌스 사건 때 그 지식인의 일원이 돼 드레퓌스를 옹호했다.

그 탓에 그는 1898년 선거에서 낙선했지만, 1902년에 다시 국회에 들어간 뒤 암살될 때까지 의원직을 유지했다.

고종석 편집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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