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들어 시장규모가 급팽창해온 한국연예계. 스타를 지망하는 젊은이들이 늘어나고 기업의 틀을 갖춘 회사들도 생겨나기 시작했다.동남아에 ‘한류’ 열풍이 불었고, 한국영화가 할리우드 영화 흥행을 누르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 잇단 연예계 비리가 들춰지며 성장의 짙은 그늘이 드러나고 있다.
연예인들과의 불공정한 ‘노예계약’, 조폭자금 유입및 파행적인 운영 등 ‘복마전’으로 불리는 연예기획사의 계약과 자금 실태와 문제점을 짚어 본다.
▼사채 및 조폭 자금, 연예계 유입설
“건설회사를 한다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말이 건설회사 사장이지 조폭이었다. 그 쪽에서는 ‘20억, 30억원이 넘어가도 좋다. 돈은 얼마든지 댈 수 있다.
그러나 원금은 보장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세워 영화 투자자금으로 끌어들이는 것을 포기했다. ‘후환’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한 영화사의 간부의 말이다. 지난해 한국영화가 큰 이익을 내자 영화에 진입하려는 조폭 자금이나 사채가 크게 늘고 있는 것은 사실.
그러나 투자사를 중심으로 한 자금이 3,000억~4,000억원으로 풍부해졌기 때문에 굵직한 영화사들의 영화에 그런 돈이 비집고 들어올 틈은 별로 없다. 그러나 감독 1인 중심의 작은 영화사들은 유혹을 떨쳐버리기 힘들다.
최근 충무로에 떠도는 소문 하나. 1급 남자 배우가 밤낮없이 룸살롱에서 살고 있다는 것. 계약기간이 만료되면서 다른 회사로 옮길 것 같은 분위기가 있자 매니지먼트사 대표가 배우를 매일 접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매니지먼트사 대표는 공공연하게 ‘조폭 출신’으로 불린다. 자금 흐름이 한 눈에 잡히는 영화사와 달리 구멍가게식인 매니지먼트사에는 사채 자금이나 조폭 자금이 쉽게 흘러 들어간다. 한 두 명의 매니저가 조폭 자금과 만나면 ‘기획사’가 탄생한다.
‘조폭 출신’이 더 많은 곳은 가요계. 해체된 한 그룹의 팬 클럽은 “매니지먼트사 사장에게 멤버들이 엄청나게 맞아 입원한 적도 있다”며 각계에 탄원서를 보내기도 했다.
문제는 이런 기획사들이 연예인을 불법 감금하거나 구타 등의 비인간적 행위로 ‘내 사람’으로 만들고 있다 것이다.
여의도에 있는 한 투자알선회사의 간부는 “사채나 조폭 자금의 경우 영화를 선호하지만, 연예기획사 쪽으로도 투자가 쉽게 이뤄지는 편”이라고 밝혔다. 이런 자금은 단기간에 원금 회수 압력이 있어 검은 돈의 로비 등 무리수를 두는 것은 당연하다.
▼전속계약= 노예계약
지난해 음반제작자들의 모임인 한국연예제작자협회가 ‘시사매거진 2580’의 보도로 MBC와 맞설 때 기자회견장에서 가수들은 “우리는 노예가 아닙니다”라는 현수막이 걸었다. 가수와의 전속계약을 노예계약이라 표현한 것에 대한 항의였다.
그러나 절대 있을 수 없다는 ‘노예계약’은 공정거래위원회의 조사에서 사실로 드러났다. 그것도 영세한 기획사가 아니라 국내 굴지의 음반기획사들까지.
SM엔터테인먼트 소속 가수인 전 HOT 멤버 문희준과 플라이 투 더 스카이의 황윤석 등에게 회사에 불이익을 끼쳤을 경우.
계약금의 5배, 음반제작비를 포함한 총 투자액의 5배, 잔여계약기간 예상이익금의 3배에 별도로 1억원이라는 엄청난 배상금을 물도록 했다.
반면 조성모와 김종국이 소속된 혜성미디어를 비롯한 많은 기획사는 가수와의 계약을 일방적으로 양도 또는 해지할 수 있도록 해 놓았다.
신인이 처음 계약할 때는 불공정이 더욱 심각하다. 계약금은 평균 500만원 이하이고, 인세는 아예 없거나 극히 적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계약은 보통 3~5년의 장기로 한다. 두 번째 음반이 성공하면 비공식적인 보너스를 지급하지만, 계약 자체는 바뀌지 않는다.
한 매니저는 “신인 가수의 경우 위약금 항목에 예상수입까지 물도록 돼 있는 경우가 많다”며 “회사가 일방적으로 예상수입을 정하면 가수는 꼼짝없이 그 돈을 물어내야 한다”고 말했다.
이런 불공정 계약은 기본적으로 신인 때 확실하게 잡아야 본전을 뽑을 수 있다는 음반기획사의 생각 때문이다.
한 음반기획자는 “신인을 발굴, 음반을 만들어 성공할 확률은 극히 낮다. 음반기획사는 그래도 혹시 있을지 모르는 대박을 위해,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심정으로 숙소부터 연습에 이르기까지 억 단위의 막대한 돈을 투자한다.
투자한 돈은 회수해야 하지 않느냐”고 되묻는다. 불안정한 투자가 불공정한 계약을 만들고 있다.
▼연기자는 얼굴마담
연예기획사 관계자들의 표현에 따르면 탤런트와 영화배우 등 연기자는 얼굴 마담이다. 실제 돈을 벌어다 주는 것은 가수이다.
톱스타 연기자에게는 수입의 80~90%까지 줘야 하지만 같은 급의 가수에게는 인세(보통 CD 한 장에 1,000~1,500원)만 주면 나머지는 고스란히 기획사 몫이 된다. 가수는 여기에 업소출연과 콘서트라는 덤이 있다.
한 달에 3,000만원을 받는 업소를 지방 포함해 10군데만 뛰어도 음반 제작비 2억~3억원은 그대로 건질 수 있다.
때문에 기획사는 일단 6억~7억원씩을 주고 톱스타 연기자를 영입해 인지도를 높인 다음 ‘스타 브랜드’를 통해 신인 연기자와 가수를 방송사에 끼워 파는 것이다.
한 매니저는 “그 비용이나 신인들을 홍보해 띄우는 비용이나 거의 비슷하다” 며 “인기 TV 프로그램의 한 코너에 출연하는 신인가수들은 십중팔구 ‘끼워팔기’를 통해 데뷔했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박은주기자 jupe@hk.co.kr
김지영기자 koshaq@hk.co.kr
■검찰수사 전말/PR비 비리제보 '대수술'의 시작
연예계의 고질적 PR비(앨범홍보비) 비리를 고발하는 문화개혁시민연대의 제보가 올해 1월 서울지검에 접수됐다.
PR비 비리에 대한 고발 프로그램이 방송된 지 며칠 뒤 였다. A4용지 한장 분량의 제보에는 기획사에서 돈을 받은 방송사 PD와 스포츠지 기자 8명의 명단이 적혀 있었다.
이 명단을 바탕으로 5개월여간 내사를 벌이던 검찰은 이달초 마침내 연예기획사 ‘빅4’로 불리던 SM엔터테인먼트와 싸이더스, 도레미미디어, GM기획에 대해 전격적인 압수수색을 실시하고 이들 기획사 간부와 방송사 PD, 인기 가수와 연예인들을 줄줄이 소환했다.
이어 국내 양대 음악 케이블방송인 m.net과 KM TV가 수사대상에 오르고 m.net 김종진 제작본부장, MBC 황용우, 김영철 PD, 스포츠투데이 이창세 본부장과 스포츠조선 윤태섭 부국장 등이 구속됐고 MBC 은경표 PD, GM기획 대주주 김광수씨, 도레미미디어 박남성씨 등이 지명수배됐다.
SM 사주 이수만씨와 김광수, 박남성씨 등이 유상증자 과정에서 수십억원을 횡령한 혐의도 드러났다. 방송ㆍ정ㆍ관계에 대한 주식로비 의혹이 제기되면서 기획사 주주들에 대한 수사도 진행중이다. 특수부 검사와 계좌추적반까지 투입돼 연예계 ‘벤처비리’ 수사로 비화했다.
폭력조직이 연예기획사의 경영에 관여, 폭력을 행사하고 지분을 빼앗은 정황이 드러나면서 지난해 최대 흥행작 ‘조폭마누라’에 대한 조폭자금 유입 여부 수사도 이뤄지고 있다.
검찰은 금품수수 및 횡령 혐의가 드러난 연예기획사 대표와 대주주, 방송사와 스포츠지 간부는 모두 처벌한다는 방침이다. 가요ㆍ음반 시장 외에 영화와 탤런트, 개그맨 등도 일부 수사대상에 포함될 전망이다.
검찰 관계자는 “PR비 커넥션과 대형 기획사의 횡령ㆍ증자 비리 등 연예계 고질적 비리를 뿌리뽑겠다”면서도 “수사기간을 향후 2~3주 정도로 잡고 있다”고 말해 핵심관련자 처리 이후 수사를 마무리할 방침임을 내비쳤다.
배성규기자 vega@hk.co.kr
■연예기획사 현황·실태/400社 난립 주먹구구운영 많아
연예기획사는 하는 일에 따라 크게 음반기획사, 영화기획사, 매니지먼트사로 나뉜다.
최근 검찰 수사와 공정거래위원회 조사에서 주로 문제가 되고 있는 곳은 작품을 기획하는 영화쪽 보다는 전속 연예인(가수, 연기자)을 띄워야 돈을 버는 음반과 매니지먼트 쪽이다.
음반기획사가 생겨난 것은 1990년대 초반. 현재 수배중인 도레미미디어의 박남성 사장이 시초로 꼽힌다.
이전까지 음반사가 총괄하던 음반제작관련 업무 중 가수발굴 및 음반기획, 홍보와 매니지먼트가 분리됐다.
자금과 조직망이 필요한 음반유통사에게 맡기고, 대신 음반제작비를 선급금(일명 마이킹)형태로 받는 관행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이제는 아이디어와 가수만 있으면 누구나 음반기획사를 차릴 수 있게 되었지만, 일종의 부채인 마이킹은 적지 않은 부담으로 작용했다.
빚을 지고 시작한 사업인 만큼 어떻게든 수익을 올려야 한다는 압박을 받기 때문이다.
비교적 안정적인 수입을 보장하는 유통이 떨어져 나가면서 한번에 모든 돈을 회수해야 한다는 도박심리가 커질 수 밖에 없고, PR비는 물론 ‘노예계약’이라 불릴 만큼 불합리한 계약도 서슴지 않는다.
90년대 중반 이후 음반산업 팽창과 벤처 붐을 타고 음반기획사의 수는 급속하게 늘었다. 현재 연예제작자협회에 등록된 270여개를 포함, 군소 기획사까지 합하면 400여개로 추산된다.
이중 몇몇 기획사들이 큰 돈을 모으게 되면서 기업화하기 시작했고 유통이나 케이블 TV, 영화 등으로 영역을 확장했다.
코스닥 등록도 가능해졌다. 검찰 수사 대상에 오른 도레미미디어, SM, 예당 등이 대표적인 예다. 하지만 극소수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기획사들은 여전히 영세하다.
또 여전히 오너 중심의 1인 체제라 늘어난 산업규모에 비해 불투명한 주먹구구식 경영이 대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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