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떠남, 곧 여행이란 인간에게 본질적인 의미를 지니는 행위이다. 인간이 개인이라는 좁은 범주를 벗어나 세계를 경험하는 행위이고 이 행위를 통해 인간은 자아를 확대, 고양시켜 높은 경지의 인격을 완성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세계의 신화에서 영웅은 언제나 여행을 경험한다. 헤라클레스는 괴물 히드라를 퇴치하고 용이 지키는 황금 사과를 따오는 등 열 두 가지 난제(難題)를 해결하기 위해 집을 나섰고, 고구려의 주몽은 적대자들의 핍박을 피해 광활한 만주 벌판으로의 여정을 떠났다.
중국신화에서는 주목왕(周穆王, BC1001-947), 곧 목천자(穆天子)의 여행 이야기가 유명하다.
주목왕은 주나라 5대 임금으로 혼란했던 나라를 안정시킨 현군(賢君)이었다.주목왕에 관한 신화는 3세기 말에 발견된 목천자전(穆天子傳)에 주로 실려 있고 열자(列子) 습유기(拾遺記) 술이기(述異記)와 같은 책에도 흩어져 담겨 있는데 그 내용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주목왕이 아버지 소왕(昭王)의 뒤를 이어 임금이 되었을 때 , 어느날 지구 서쪽 끝의 나라에 산다는 화인(化人)이라는 사람이 찾아왔다.
그는 불속에서도 타지 않고, 벽도 뚫고 지나가는 신기한 능력의 소유자였다. 왕은 그를 신처럼 공경하고 임금처럼 접대하였으나 그는 궁궐을 더럽다고 여겨 거처하지 않고, 진수성찬을 비린내가 난다고 먹지 않고, 미녀들도 냄새가 난다고 가까이 하지 않았다.
얼마 후 그는 임금에게 어딘가 함께 놀러 가자고 청하였다. 왕이 그의 소매를 잡자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이윽고 궁궐에 이르렀는데 그곳은 금은보화로 장식되어 있고, 보고 듣는 것과 입으로 먹는 것이 모두 인간세상의 것이 아니었다.
왕이 문득 지상을 내려다 보니 자신의 궁궐은 흙덩어리를 쌓아놓고 거적을 씌워놓은 듯 초라하기 그지 없었다.
왕이 돌아가고 싶다고 하자 마치 허공에서 떨어지는 듯하더니 깨어났다. 시종들은 여전히 곁에 있고 차려놓았던 술과 안주도 그대로 있었다. 어찌 된 셈인지를 묻자 화인이 아뢰길 " 저는 폐하와 함께 정신으로 여행을 한 것입니다.
몸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라고 하였다. 왕은 이후 나라 일을 돌보지 않고 오직 멀리 여행할 것만 생각하였다.
주목왕은 화인과 신기한 체험을 한 후 특히 서쪽 세계를 동경하게 되었다. 꿈속에서 가보았던 그 세계를 실제로 가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마침내 왕은 대규모의 원정단을 조직하여 여행 길에 올랐다.
일곱 개의 정예부대로 구성한 친위대가 호위하고, 여덟 필의 준마가 끄는 수레에 천자는 탑승했다. 수레를 끄는 자는 당대 최고의 말몰이꾼 조보(造甫)였다.
여덟 필의 준마는 그 옛날 주 무왕(武王)이 은(殷)의 폭군 주왕(紂王)을 칠 때의 싸움말들의 후예인데, 전쟁이 끝난 후 산에 풀어 놓여져 야생마가 되었던 것을 조보가 잡아 길들인 것이다.
각기 녹이(綠耳), 적기(赤驥), 백희(白犧), 산자(山子) 등 고유한 이름이 있었고 발이 땅에 닿지 않거나, 새보다 빠르거나, 하루 밤에 만리를 갈 정도로 빨랐다고 한다.
주목왕의 원정단은 좋은 날을 잡아 출발하여 서쪽으로 행군하였다. 먼저 양우산(陽紆山)에 이르렀다.
중국의 젖줄인 황하를 다스리는 수신 하백(河伯)이 도읍을 정하고 사는 곳이었다. 강가에서 왕은 하백에게 제사를 드렸는데 벽옥(璧玉)과 소 말 돼지 양을 강물에 빠뜨려 제물로 바쳤다.
이에 하백은 신관(神官)을 통해 왕에게 곤륜산(昆侖山)의 보물과 영원한 복을 약속하였다. 왕은 다시 서쪽으로 나아갔다. 가는 길에 많은 변방의 부족들이 가축과 곡물 등 토산물을 바쳤고, 왕은 그들에게 비단 황금 등을 답례로 주었다.
얼마 후 주목왕은 곤륜산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대신(大神) 황제(黃帝)의 궁전을 둘러보고 제사를 드렸다.
곤륜산의 한 봉우리인 군옥산(群玉山)은 옥이 산과 밭을 이루고 있을 정도로 많았다. 왕은 일만 개의 옥을 취하여 수레에 실었다.
마침내 왕은 서왕모(西王母)의 나라에 도달하였다. 왕은 처음 만날 때의 예물로 꽃무늬가 있는 비단끈을 서왕모에게 주었다.
목천자전에서는 이후 왕이 서왕모와 어떻게 즐기고 사랑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삼가고 있다. 그것은 이 책이 천자의 여행기로서 엄숙한 필치를 구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는 “주목왕이 서왕모와 노느라 고국으로 돌아갈 일을 잊었다”는 다른 책에서의 언급을 통해 왕이 이국의 여신과 한동안 사랑에 빠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아손이 카르타고의 여왕 디도로부터 청혼을 받고, 솔로몬이 시바의 여왕과 사랑에 빠졌듯이 영웅은 여행길에 미녀를 만나게 되어 있다.
그러나 대부분 영웅은 미녀를 버리고 다시 길을 떠난다. 그에게는 세상을 위한 과업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주목왕은 서왕모와 아름다운 연못 요지(瑤池) 가에서 매일 잔치를 벌이며 환락에 젖었다. 정말 돌아갈 일 조차 잊고 지내던 어느날, 갑자기 도성으로부터 급보가 전해왔다. 주나라 동쪽 변방의 서언왕(徐偃王)이 침공해와 도성이 위급하다는 보고였다.
결국 주목왕과 서왕모는 요지에서 마지막 잔치를 열고 이별의 의식을 거행한다. 이 자리에서 서왕모는 왕을 향해 이렇게 노래했다.
“흰 구름은 하늘에 떠 있고, 산봉우리 드높이 솟았는데. 그대 가시는 길은 아득하고, 산과 내가 우리 사이를 떼어놓았네. 바라건대 그대 오래 사시어, 다시 오실 수 있기를.”
이에 대해 왕은 이같이 화답했다. “동쪽의 내 땅으로 돌아가, 나라를 잘 다스리리. 만백성이 잘 살게 되면 그대를 볼 수 있으리. 삼년이 되면, 내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리.” 그러나 왕은 다시는 서왕모 곁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어쨌든 왕은 서왕모와 환락의 단꿈에서 깨어나 급히 귀국하였다. 돌아오는 도중에 생긴 또 하나의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있다. 왕의 군사가 아직 주의 국경에 미치지 못했을 때였다.
한 변방 부족이 언사(偃師)라는 솜씨 좋은 장인(匠人)을 바쳐왔다. 급한 와중에서도 왕은 호기심이 발동했다.
그래서 언사에게 물었다. “그대는 무엇을 잘 할 수 있는가?” 언사가 대답했다. “명령만 내리시면 다 할 수 있습니다. 그전에 제가 만들어 놓은 것이 있는데 한번 보시겠습니까?” 이튿날 언사가 한 사람을 데리고 왔다.
왕이 누구냐고 묻자, 자신이 만든 광대 인간이라고 했다. 왕이 놀라 살펴보니 모든 동작이 사람과 똑 같았다. 턱을 끄덕이며 노래를 부르고, 손을 흔들며 춤 추는 것이 능숙하기 그지 없었다.
왕은 후궁들로 하여금 그것을 구경하게 하였다. 그런데 재주가 끝날 무렵 광대가 후궁들에게 윙크를 하는 것이 아닌가? 왕은 언사가 속인 줄 알고 크게 노하여 그를 베려고 하였다. 언사가 깜짝 놀라 광대를 즉시 해체하여 왕에게 보여드렸다.
그것은 가죽과 나무를 아교로 붙이고 옻칠과 단청을 해서 만든 것이었다. 왕은 언사의 재능에 감탄하여 그를 수레에 태우고 귀국하였다.
이 에피소드는 중국 최초의 로봇 혹은 사이보그에 관한 기록이라 할 만하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도 대장장이 신 헤파이스토스는 스스로 움직이는 세 다리 의자와 황금 시녀를 만들어내고, 조각가 피그말리온은 상아로 미녀를 빚어낸다.
여기에서 테크놀로지에 대한 불신감은 보이질 않는다. 그러나 언사의 광대는 분수에 벗어난 짓을 함으로써 주인을 위태로운 지경에 빠뜨린다. 테크놀로지의 남용을 경계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주목왕의 서쪽으로의 긴 여행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여기에 이 신화의 고유한 현실적인 맥락이 있다.
즉위 당시 주의 천하에 대한 지배력은 급속히 쇠퇴하고 있었다. 주목왕의 미지의 땅으로의 여행 그리고 성공적인 귀환은 변방 세력에 대한 주왕권의 안정된 통치능력을 상징한다.
다시 말해 왕의 여행 신화는 주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이야기인 것이다. 이런 취지는 후세 문학 속에서 훌륭히 계승된다.
서유기(西遊記)처럼 국가가 아닌 개인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서쪽으로 긴 여행을 떠나는 삼장법사 일행의 모습에서 우리는 주목왕의 변형된 이미지를 발견할 수 있다.
■목천자전(穆天子傳이란?
서기 281년, 서진(西晉) 무제(武帝)시절 어느날, 당시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한 사건이 생겼다. 급현(汲縣)이라는 고을에서 부준(不準)이라는 도굴꾼이 한 왕릉을 도굴하였는데, 아주 오래된 책들이 나온 것이다.
그 왕릉은 전국(戰國)시대 위양왕(魏襄王)의 무덤으로 당시로부터 600여년 전쯤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런데 그 책들은 죽간(竹簡)이라는 대나무쪽에 오래된 글자체로 쓰여져 있었다. 그 중의 한 책이 특별히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다.
기원전 10세기 쯤에 생존했던 주목왕(周穆王)의 신비로운 여행담을 기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새로운 고고학적 발굴은 뉴스가 된다.
도굴꾼에 의해 빛을 본 주목왕의 여행기 목천자전(穆天子傳)도 당시에 큰 화제가 되었고, 곧 바로 학자들의 정리를 거쳐 중국신화의 중요한 자료로 남게 되었다.
/글 정재서 이화여대 중문과 교수 그림 서용선 서울대 서양화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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