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통신과 인터넷을 중심으로 벤처열풍이 거세던 시절, 어느 출판인이 이런 말을 했다. “실은 출판이야말로 벤처”라고.맞다. 출판이란 아주 적은 돈으로 시작할 수 있으면서 ‘대박’을 터뜨리기 쉬운 사업이다. 1만원짜리 책 한 권이 10만부가 팔리면 매출이 10억인데, 기실 출판계에서 10만부짜리 책이란 희귀한 것이 아닐 뿐더러 그 책을 만드는데 들어가는 인력도 단촐하기 때문이다.
같은 의미에서 음반산업도 벤처 업종에 든다. 지난 해까지만 해도 음반 한 장이 10만장 팔리는 일이 그다지 힘들지 않았을 뿐더러 거기에 들어가는 인력 역시 아주 단순화하면 작사자, 작곡자, 가수 등으로 많지 않다.
영화업종은 이보다는 훨씬 복잡한 구조 속에 진행되지만 최근 3년간 계속된 한국영화 르네상스 덕에 역시 투입액수에 비해 소출이 많은 벤처업종으로 꼽힌다.
출판부터 음반, 영화 등 문화계의 벤처업에 요즘 찬서리가 내리고 있다. 음반 영화 등은 검찰의 수사로 단 한편의 ‘대박’을 위한 검은 뒷거래가 속속 드러나고 있는 중이고 출판은 종로서적이라는, 역사가 가장 오랜 대형서점의 부도를 만났다.
종로서적이 최종 부도를 내고 문을 닫은 6월 4일, 신문기사에는 지식산업의 상징이 문을 닫는다는 안타까움이 절절했다.
그 후 출판계에서는 종로서적 살리기 대책협의회가 구성되는가 하면 종로서적을 살리자는 문화인들의 호소가 신문에 잇따라 등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종로서적을 살리자는 움직임은 흐지부지 끝나버렸는데 실은 부도가 나던 첫날부터 출판인들의 속내에서 그 조짐은 느껴졌다. 이들은 공식적으로는 “종로서적을 살려야 한다”면서도 “곪던 것이 터졌다”는 말을 숨기지 않았다.
이들은 종로서적이 갖고 있는 문제점으로 80년대 잇따라 생겨난 대형서점과 최근 들어 매출이 급증한 온라인 서점 등 경쟁업체 등장에 발빠르게 대응하지 못한 경영미숙을 대외적으로 꼽았지만 사석에서는 종로서적이 갖고 있는 불투명성이 오늘의 화를 자초했다고 지적했다.
현재 종로서적은 문을 닫은 상태에서 30억원 어치 정도의 책을 안고 출판사에 돌려주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해 출판사들로 구성된 채권단협의회측은 “시기를 놓치면 가치를 잃어버리는 참고서나 잡지까지 그대로 안고 있어서 답답하다”며 비난하고 있다.
또한 종로서적의 오랜 고객들은 “전산화에 더딘 탓도 있겠지만 거래를 하면서 판매량과 재고량에 대한 구분이 명확하지 않다가 이런 상황까지 왔기에 부도가 난 상태에서도 채권 채무 관계를 분명히 밝힐 수 없다”고 지적한다.
결국 외형적으로는 ‘가장 오랜 지식산업의 상징’이라는 종로서적은 실제에서는 ‘상거래의 기본을 갖추지 못한 불투명한 기업’으로 인식되고 있다. 아무리 상징의 의미를 살리려고 해도 현실이 이러하니 팔을 걷어부치고 나설 이들이 없다.
네덜란드의 경제학자가 100년 이상 살아남은 기업을 연구한 결과, 장수하는 기업은 영악한 기업이 아니라 도덕적인 기업이었다고 한다.
결국 착한 사람을 모범으로 권유한 덕분에 생물계의 패자가 된 인류의 생존 메커니즘은 기업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것이다.
‘한류’니 뭐니 하는 갖가지 훈장까지 달고 급성장하던 연예산업 역시 부도덕한 방법으로는 계속 성장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상징은 현실을 덮을 수 없다. 장상 총리 서리를 보는 심정도 똑같다. 최초의 여성 총리가 배출된다는 상징성은 좋지만 그가 살아온 모습이 필부필녀의 도덕성만큼에도 미치지 못할 때는 결코 상징이 현실의 남루함을 가리지 못할 수 있다.
서화숙 문화부장 hssu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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