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의원회관으로 여러 사람들이 전화를 해 왔다. ‘나의 이력서’ 첫 회분이 나간 것을 보고 걸어 온 안부 전화였다. “‘영원한 청년’이라는 제목이 딱 어울린다”는 칭찬도 기분 좋았고, “앞으로 어떤 이야기들을 풀어나갈 지 기대된다”는 말도 듣기 싫지 않았다.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은근히 부담이 느껴졌다. 나를 잘 아는 사람들은 물론 일반 독자들에게 내가 살아 온 길과, 우리의 지난 정치사를 과연 제대로 들려줄 수 있을지 고민스러웠다.
저녁 뉴스를 보고 우연히 TV 채널을 돌리자 30대 때의 내 모습이 화면에 나왔다. 1966년 9월 제6대 국회 모습이었다.
독립운동가 김좌진(金佐鎭) 장군의 아들이었던 김두한(金斗漢) 전 의원의 일대기를 그린 드라마의 한 장면이었다.
36년 전의 일이었지만 마치 낡은 필름을 돌리기라도 하듯이 머리 속에는 당시의 장면들이 ‘스르륵’ 스쳐 지나갔다. 내 젊은 시절의 초상이 TV에 나오다니…. 마치 그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가슴이 쿵쾅거렸다.
“그래, 그랬었지. 저 때는 참 힘이 넘쳤었는데….” “그런데 나로 분한 저 탤런트는 처음 보는 얼굴이잖아. 잘 생기긴 했는데 그래도 내 젊을 때 보다는 못한 것 같아.”
옛 기억이 한꺼번에 밀물처럼 밀려든 탓에 드라마가 끝난 뒤에도 한 동안 흥분이 가시지 않았다. 사실 이 연재를 어떻게 풀어갈 까 여러 생각도 해 봤지만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오늘은 이 이야기부터 해 보고 싶다.
자료를 찾아보니 그날은 66년 9월22일이었다. 63년 11월 민주공화당 소속으로 처음 국회의원 배지를 달았으니 당시 나는 의정활동 3년이 채 못된 신출내기 초선 의원이었다.
그렇지만 젊었던 만큼 피가 끓었고, 신문기자를 그만 두고 정치권에 뛰어들 때의 열정이 조금도 식지 않았던 때 였다.
그 날 아침 나는 집을 나오면서 마음을 다잡았다. 한국비료 밀수사건, 이른바 사카린 밀수사건은 온 국민의 분노를 불러 일으키고 있었다. 여야가 따로 없다고 생각했다.
이날 예정된 대정부질문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이 문제를 따지겠다고 결심했다. 당시 발언 이후 내게 미칠 불이익 같은 것은 안중에 없었다.
나는 이날 대정부질문의 첫 발언자로 연단에 올랐다. 물 한 모금을 천천히 들이킨 뒤 말을 꺼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이병철(李秉喆)씨가 천인공노하게도 사카린을 밀수해 온 국민을 격분시켰습니다. 그러나 국회는 서울시의 육교가 어떠니 저떠니 하면서 시간을 허비했습니다. 이런 중차대한 때에 여야 총무단은 무얼하고 있습니까. 나는 이것이 불만입니다.”
내 발언이 심상치 않은 조짐을 보이자 당 지도부는 난감해 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야당의 공세에 여당 의원이 불을 지핀 셈이니 좌불안석일 수 밖에.
나는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발언을 이어갔다. “이병철씨를 왜 구속하지 않습니까. 법정 최고형을 적용해야 합니다. 부산세관장은 왜 잡아넣지 않습니까. 그 사람은 직무유기를 하지 않았습니까. 지금 정부에서 수사하는 것을 보면 송사리만 잡는다는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의사당 안은 갑자기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 졌다. 야당 의원들은 발언이 끝나자 큰 박수로 나를 격려했다. 여당 의원들도 대다수 공감한다는 표정들이었다.
내 뒤를 이어 민중당의 김대중(金大中) 의원도 이병철씨의 즉각 구속을 주장하며 나를 거들었다. 의사당 분위기는 바야흐로 폭풍 전야의 고요함 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다음으로 연단에 올라간 한국독립당 김두한 의원의 발언 때 국회 사상 전무후무한 일이 벌어졌다. 그 유명한 의사당 인분 투척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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