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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으로 현실읽기] (10)원효 '대승기신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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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으로 현실읽기] (10)원효 '대승기신론소'

입력
2002.07.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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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스름녘, 창문을 열고 도시의 불빛을 바라보다가 문득 십자가의 불빛에 놀랄 때가 있다.저렇게 많은 교회가 도시의 어두운 거리를 밝히고 있었구나, 미망에 싸여 거리를 헤매는 동안에도 우리 머리 위에는 저토록 아름다운 불빛으로 빛나는 믿음이 있었구나, 하고 감탄하는 것이다.

삶은 어지럽고 확정된 진리는 찾지 못하리라는 비관적 전망이 유포되는 동안 우리의 믿음은 퇴색해가고, 오직 거대한 자본만이 희망의 빛인 양 우리를 유혹한다.

중생들은 애옥살이에 지쳐 더 이상 어떤 희망도 가지기를 거부하는데, 머리가 굵어질수록 세상은 믿음을 갉아먹는다.

진리를 기록하는 책은 날이 갈수록 두꺼워지지만 내 생활 속에서 진리는 옅은 그림자조차 드리우질 않는다. 도대체 뭐가 문제인가.

그 즈음이면 이런 질문을 던지곤 한다. “내 마음 속에 근본적인 깨달음이 있다는 게 정말일까?”

원효(元曉ㆍ617-686)는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에서 자신의 믿음을 결코 믿지 말라고 이야기한다. 진리라고 믿는 그 믿음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요구하는 것이다.

믿음을 의심하지 않는 것이 바로 중생들의 특징이긴 하지만, 근원적인 질문을 제기하지 않는 한 우리는 현실을 변혁할 아무런 힘도 의지도 내지 못한다.

우리가 마음이라고 하는 저 근원에는 우리 자신도 알지 못하는 거대한 근원적 무지의 덩어리가 도사리고 있다.

유식학파(唯識學派)에서는 그것을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고 한다. 중생의 번뇌와 윤회의 근원이기도 한 아뢰야식은, 동시에 깨달음의 본체이기도 하다.

깨닫지 못한 불각(不覺)의 상태가 중생의 삶이라면 깨달은 존재가 부처다. 그러나 깨달음이란 것이 인간의 마음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마음은 ‘본래 깨달은 존재(本覺)’이다. 중생의 ‘불각’을 어떻게 ‘본각’으로 변하게 하는가가 관건이다.

그러니 중생들이 부처의 길로 나아가게 할 것인가, 고통스러운 사바세계의 중생들이 어떻게 행복한 극락을 살아가게 할까 하는 고민이 나올 수 밖에 없다.

이것은 해골 속의 물을 마신 후 깨달음을 얻은 원효가 저자거리에서 살아가며 화두로 삼았던 것이기도 하다.

중생이 없다면 부처도 당연히 없다. 중생의 입장에서 보자면, 모든 깨달음의 출발점은 중생의 삶이다.

고통을 고통이라고 여기지 않는 중생들이 그 굴레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서 사람들 사이로 들어가서 거침없는 무애행을 했던 원효가 아닌가.

원효가 파계했다는 비난을 무릅쓰고 저자거리에서 술병을 옆에 차고 무애가를 불렀다든지, 요석공주와의 사이에서 설총을 낳는 등 기행을 저지른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해된다.

공부도 시원치 않으면서 겉멋에 겨워 술 마시고 성적 쾌락을 추구하는 요즘의 땡초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중생에 대한 다함없는 애정이 바로 ‘자비’라면, 원효의 삶은 자비로 가득찬 것이었다. 이렇게 중생의 마음을 치열하게 탐구한 책이 바로 ‘대승기신론소’이다.

그 탐구는 당연히 ‘나의 수행’으로 이어진다. ‘기신론’에서 권하는 구체적인 수행 방법인 오행(五行)은 보시, 계를 지킴, 참음, 정진, 지관(止觀ㆍ사물을 객관적으로 관찰하여 정확히 판단하고 대처하는 것)을 말한다.

이를 통해 중생들은 깨달음으로 가는 길을 걸을 뿐만 아니라 비로소 올바른 믿음을 일으킬 수 있다.

나의 믿음에 대한 계속적인 의심과 수행을 통해서 진정한 믿음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은, 믿음이 하나의 결정체라기보다 끝없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말한다.

그리하여 올바른 믿음에 이르는 순간 그것은 곧 깨달음의 순간이기도 하다. ‘초발심(初發心)이 곧 완전한 깨달음(正覺)’이라는 경전의 말이 바로 이 뜻이다.

나는 올바른 믿음을 일으켰는가 하고 되묻는 순간, 어쩌면 미망의 중생계에서 벗어나는 길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사유와 실천의 통일을 살아가는 방식이며, 천 년 세월을 넘어 원효가 우리에게 한 소식 던져주는 무언의 질책이기도 하다.

/김풍기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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