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선거가 정상적으로 치러지는 나라에서 임기 말의 권력누수는 불가피한 현상이다. 누군들 권력으로부터 멀어지는 대상에게 존경과 충성을 바치려 하겠는가.새로 들어 오는 쪽에 기를 쓰고 줄을 서려 하는 것은 인지상정 이다. 나에게는 그런 누수가 용납되지 않느니, 마지막 날까지 권한과 책임을 행사할 것이라느니 하는 것은 모두 부질없는 욕심에 불과하다.
연임으로 8년간이나 재임했던 미국의 클린턴 전 대통령도 말년엔 심각한 레임덕에 직면해야 했다.
어제까지 부통령으로 자신 밑에서 한솥밥을 먹었던 고어후보의 눈치를 살펴야 했는가 하면, 특히 마지막 업적으로 남기려 했던 북한 핵과 미사일 타결을 위한 평양행이 당선자측의 신경질적인 반대로 좌절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김대중 대통령이라고 예외일 수 없다. 오히려 ‘5년 단임’의 통과의례를 톡톡히 치루고 있다고 보면 틀림이 없을 것이다.
가뜩이나 두 아들을 비롯한 측근비리는 임기 말을 더욱 비참하게 하고 있다. 지난번 기자간담회에서 김 대통령은 아들 문제에 관해 사전에 아무런 보고를 받지 못했다고 했다.
그렇다면 청와대를 비롯한 사정 기관들이 직무를 태만히 했거나 유기한 경우다. 아니면 이런 보고를 싫어하는 김 대통령의 뜻을 헤아려 고의로 누락했을 가능성도 있다. 어느 것이 ‘보고 누락’의 이유인지 명확하지 않으나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둘째 아들은 1주일에 평균 사흘 정도는 자신의 ‘집사’들과 이들이 ‘간택’해 온 사업가들과 어울려 폭탄주를 마셔댔다.
하루 밤 술값이 300~400만원이나 하는 ‘소산(小山)’의 5년 전 단골 그 룸 싸롱에서다.
이들 집사들은 ‘왕 회장(홍업씨)’의 어부인에겐 그들이 이권개입해서 뜯어낸 돈으로 다이어 반지까지 진상했다고 한다. 부패 구조의 전형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유학생이라는 막내 아들도 한 달에 한 번 꼴 이상으로 뻔질나게 서울을 찾았다. 또 유학생신분에 어울리지 않게 100만 달러짜리 호화주택을 구입해 살았다.
생활비를 보낸 부모입장에서 아들의 씀씀이를 한 번쯤 당연히 의심 했어야 했다. 그럼에도 아무런 감시나 제재조치가 취해지지 않았다. 사정 기관들과 한 통속으로 놀아나지 않았다면 달리 설명할 수 없는 일이다.
풀리지 않는 의문은 또 있다. 중국과의 마늘협상을 둘러싼 난맥상은 한마디로 가관이다. 이 정부의 국정 장악력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냈다.
‘긴급수입제한(세이프 가드)’조치를 2년 반 후 종료키로 합의해 준 사실을 놓고 ‘알았느니, 몰랐느니’ 하는 부처간의 책임공방은 이 정부가 제정신 있는 집단인가를 반문케 된다.
평소 꼼꼼하기로 소문난 김 대통령도 보고 받지 못했다면 그럼 누가 받았단 말인가. 이러고도 ‘되돌아오는 농촌’ 이 가능하겠는가.
더욱 황당한 것은 복지부 장관이라는 사람의 막가파식 처신이다. 그는 퇴임 때 자신의 경질이 다국적 제약사의 로비 때문이라고 청와대를 향해 칼끝을 겨누었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김 대통령은 제약회사 압력 받고 복지부 장관 교체 인사를 한 한심한 통치자가 된다.
그의 직전 보직은 청와대 보건복지담당 수석 비서관이다. 이번 파문은 이런 사람을 수석 시키고 장관 시킨 인사권자에게 당연히 그 책임이 돌아갈 수 밖에 없다.
김대중 정부가 이 지경에 이른 가장 큰 이유는 인사의 실패다. 최소한의 여과과정이라도 거쳤더라면 이런 코미디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대개는 ‘끼리끼리’ 아니면 인사권자의 독선과 아집에 따라 이뤄졌기 때문이다. ‘안동수 파문’과 ‘이태복 파동’, 민주당 의원까지 공격한 ‘김정길 재기용’ 등이 좋은 예다. 야당시절 그들은 집권세력을 향해 뚝하면 ‘인사가 망사(亡事)’라고 공격했다.
이제 그들은 ‘인사가 흉사(兇事)’라는 비아냥을 들어도 할 말이 없게 됐다. 이 시점에서 가장 걱정스런 점은 우리가 다시 실패한 대통령을 갖게 될지 모른다는 사실일 것이다.
노진환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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