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라이터를 켜라’의 도입부인 동창 모임, 얄밉게 친구들 사이를 오가며 이간질을 하는 한 남자가 등장한다.시트콤 ‘웬만해선 이들을 막을 수 없다’에서 가수 윤종신(이 때 맺은 친분으로 윤종신은 처음으로 영화 음악을 맡았다)과 ‘비실이 형제’로 출연하기도 했던 사람이다. 그냥 조연급 연기자로 보이지만 바로 이 영화를 만든 장항준(33) 감독이다.
김승우의 얼떨떨하고도 착한 연기나 차승원의 신경질적인 양아치 연기는 예상했던대로 관객들의 웃음을 끌어냈지만 영화보다 더 재밌는 감독이야기에 난 눈길과 맘길이 더 갔다.
감독은 드라마와 판타지를 결합한 ‘박봉곤 가출사건’의 시나리오를 썼고 ‘북경반점’의 시나리오에도 참여했다.
당시 그는 재기발랄형으로 분류되며 가능성을 높이 평가 받은 신인감독 겸 시나리오 작가로 이름을 날렸다. 그 후 오랫동안 시나리오를 써오면서 감독 데뷔 영순위로 이름이 올라있었다.
그를 처음 만난 건 4년 전. ‘불타는 우리집’이란 시나리오를 완성한 뒤 충무로에 자주 나타났다.
시나리오는 역시 주인을 닮아 즐겁고 엉뚱했지만 아마도 색다른 시도에 모험을 걸기엔 그가 검증된 감독이 아니라는 점에서 의심이 작용, 영화화하지는 못했다.
골방의 고독을 이겨내가며 작업을 하던 그를 잘 아는 주변 사람들은 그가 시나리오를 작업할 때 이마에는 붉은 띠를 두르고 벽에다는‘타도 ○○’이라든지 ‘무찌르자 ○○○’같은 하나도 안 무서운 선정적인 문구를 붙여놓는다고 전해주었다.
물론 비슷한 시기에 재능을 인정 받고 먼저 감독이 된 주변 친구 감독들의 이름이었다. 기발한 발상의 소유자답게 실제로 만나보니 그는 영화적인 것을 뛰어넘어 만화적인 인물에 가까웠다.
깡마른 체구에 커다란 몸동작으로 뭔가를 설명할 때 튀는 침의 굵기와 양이 박봉곤을 가출하게 만들었던 남편의 ‘튀기는 침과 밥풀’을 떠올리게 했다.
지독히 개인적인 나의 생각이긴 하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감독의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았던 감독 준비 기간의 고충을 보는 듯했다.
재능이 넘치고 풍부한 아이디어로 가득찼던 무거운 그의 머리 속이 이번 기회에 말끔히 비워 진다면 그가 다음 영화에서 보여줄 색다른 이야기는 얼마나 재밌을까.
재미없는 감독과 재미있는 감독이 있다면, 그는 당연 후자다. 준비기간이 길었고 숙성된 실력으로 단 한번에 관객들 가슴에 불을 켠 그는 두고두고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사람이 분명하다.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역시 몇 년 전 어느날 밤 전화벨이 울렸다.
“저기요…. 우리 여럿이 술 먹는데 지금 나오세요….” “네? 나가고 싶지만 저 자던 중이었거든요. 그리고 지금 너무 늦어서요….” 그의 대답, “그러면 우리가 그 쪽으로 갈까요?” 생활 속의 개그맨인 그가 코미디 영화를 기다려온 내 마음에 불을 켜준 게 너무 즐겁다.
/영화컬럼니스트ㆍamsaja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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