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0년 7월27일 프티 부르주아와 노동자ㆍ학생을 주축으로 한 파리 민중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군대와 시가전에 돌입하면서 프랑스 7월 혁명이 시작됐다. 출판 자유 정지, 의회 해산, 선거권 제한 등을 골자로 한 이른바 7월 칙령이 국왕 샤를 10세의 입에서 떨어진 지 이틀 뒤였다.다음날에는 바리케이드가 파리 전역으로 확산되며 왕정 복고 이후 금지됐던 삼색기가 나부꼈고, 다시 그 다음날 파리 민중은 치열한 시가전을 통해 군대를 제압하고 왕궁으로 돌진했다. 혁명이 성공하고 국왕은 영국으로 달아났다. 7월27일부터 29일까지의 혁명의 나날은 이 때부터 ‘영광의 사흘’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샤를 10세는 자신의 신민을 너무 만만하게 보았다. 1814년 왕정복고 이후 첫 국왕이었던 루이18세의 뒤를 이어 1824년 왕위에 오른 그는 대혁명의 물결에 휩쓸려 단두대에서 목이 잘린 루이16세의 동생이었다.
샤를 10세는 대혁명 이전의 옛 체제로 복귀하기 위해 극단적인 반동정책을 펼쳤고, 부르주아지를 중심으로 한 반정부 세력은 1930년 5월 총선거에서 자유주의 의원들을 원내에 다수 진출시키는 것으로 맞섰다.
국왕은 즉각 의회를 해산하고 7월에 다시 선거를 실시했으나, 이번에도 반정부 세력이 의회의 다수를 점했다. 그러자 샤를 10세는 극약 처방으로 7월 칙령을 발표했고, 이 반동적 긴급조치는 오히려 저항의 불길에 기름을 부었다.
바리케이드 뒤에서 시가전을 치른 세력 가운데는 공화파도 많았지만 자유주의 저널리즘을 통해 이 혁명을 이끈 부르주아지는 입헌왕정을 선호했고, 그래서 7월 혁명은 부르봉가(家) 샤를 10세의 보수적 입헌왕정을 오를레앙가 루이 필리프의 자유주의적 입헌왕정(7월 왕정)으로 바꾸는 것에 그쳤다. 7월 왕정은 1848년 2월 혁명으로 무너졌다.
고종석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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