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단양은 ‘단양팔경’ 등 명승지로 유명하지만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아 유서 깊은 유적이 많다.그 중 하나가 우리나라 최대의 후기 구석기 유적인 수양개(垂楊介)다.
단양군 적성면 애곡리에 자리한 이 마을은 갯가를 따라 수양버들이 휘휘 늘어져 그런 운치있는 이름을 얻었는데, 1980년 7월 충주댐 수몰지역 고고학 조사에 나선 충북대 조사단이 여러 형태의 석기를 발견하면서 유적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졌다.
조사 첫 날의 경험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600㎜가 넘는 집중호우로 강물이 불어 조사단원들은 강 건너 마을로 가기 위해 말 그대로 목숨을 건 모험을 해야 했다.
지금 생각해도 등골이 오싹하지만 폭우 덕을 톡톡히 보기도 했다. 천신만고 끝에 강을 건너 부녀회관 앞 뽕밭에 이르자 빗물에 쓸려 움푹 패인 땅 위로 석기들이 얼굴을 내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바로 석기 200여점을 수습하고 구석기시대 홍적토 원층도 확인할 수 있었다.
조사단은 83년 1차 조사를 끝내고 어려운 과정을 거쳐 85년까지 4차례 실시된 본격 발굴조사를 통해 중기 구석기에서 청동기 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문화층이 형성돼있음을 밝혀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후기 구석기 문화층(l만8,630년 전)으로, 3만여점의 석기가 출토됐다.
수양개 후기 구석기를 특징짓는 유물로는 창날이나 화살촉으로 쓰인 슴베찌르개와 돌날의 원재료인 좀돌날 몸돌을 들 수 있다.
그 중 길이 3~5㎝, 너비 3~5㎜의 좀돌날을 떼어낸 몸돌은 200점이나 발굴됐는데, 제작 방법도 다양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이는 수양개 사람들의 석기제작 기술이 매우 뛰어났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세계 구석기 학자들의 커다란 관심을 끌었다.
또 돌망치 모룻돌 등이 그대로 남아 있는 석기제작소가 50여곳 발굴돼 석기 제작술 연구에 귀중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발굴 현장을 찾은 고(故) 김원룡(金元龍) 박사께서 “당시 사람들이 방금 자리를 비운 것 같다”며 감탄하시던 일이 기억에 생생하다.
통상 수몰지역 유적이 기록으로만 남아 기억 속에서 쉽게 잊혀지는 것과 달리 수양개는 수몰 이후에도 활발한 후속 연구가 이뤄지고 있는 점도 자랑할만하다.
충북대 박물관이 86년 아시안게임 때 ‘한국 구석기문화전’을 연 것을 계기로 수양개 유물은 국제적 관심을 끌었고, 수양개 문화의 이동전파에 관한 연구 성과가 세계 학계에서 인정받게 됐다.
또 수몰 10년 만인 95~96년 5~7차 발굴이 실시돼 수몰 유적으로는 유일하게 97년 사적(398호)으로 지정됐다.
단양군과 단양향토문화연구회, 충북대 박물관이 매년 공동 개최해온 국제 학술회의 ‘수양개와 그 이웃들’은 올해로 7회째를 맞았다.
14~21일 열린 올해 행사에도 세계 7개국 학자들이 참가해 열띤 토론을 벌였다. 현재 충북도와 단양군은 국비를 지원받아 수양개 박물관을 짓고 있다.
2004년 문을 열 예정인 이 박물관이 수양개 문화의 정수뿐만 아니라 수양개와 관계된 이웃 문화까지 아우르는 세계 최고의 선사문화 박물관으로 발전하기를 바란다.
/이융조 충북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ㆍ한국구석기학회 회장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