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쓰는가. 대답은 늘 분명했다. 쓰는 일이 즐겁기 때문이다.1963년 등단하여 단 두 편의 단편소설을 쓴 것을 끝으로 만 10년 동안 글과 담을 쌓고 산 그 고통스러운 세월을 통해 터득한 것이 있다.
세상살이에서의 유일한 비교우위도, 거창한 명제로서의 존재이유도 오직 글쓰기의 즐거움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는 것.
체질적으로 소설 쓰는 일만이 내 끼의 발산과 그 신명내기에 적격이라는 사실의 확인이었다.
글쓰는 일은 생각만 해도 즐겁다. 그 즐거움 속에는 어금니에 잘금잘금 괴어오르는 글쓰기의 신명은 물론이거니와 내가 선택한 고행, 글쓰는 고통과 그 절망까지도 포함된다. 때로 글쓰기의 절망을 감추는 일이 즐거움의 깊이를 더한다.
도박하는 즐거움과 글쓰기의 그것이 뭐가 다르겠는가. 도박꾼은 즐길 뿐 그 도박을 합리화하는 그 어떤 의미 부여도 하지 않는다. 글쟁이 역시 글쓰는 일이 그냥 즐겁다고만 말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작심한 도박꾼이 자기 손가락을 자르듯 나 역시 글쓰는 즐거움에 회의를 느낄 때가 많았다. 세상을 바라보는 뒤틀린 심사만큼이나 글쓰는 행위 또는 그 결과물에 대해 냉소적이었다는 얘기다.
사실 소설 쓰기야말로 삶의 방식 중 가장 야비하고 던적스러운 광기의 소산이라는 생각이 불쑥 치밀 때가 많았다.
그러할 때 나는 아무런 미련이 없이 문학을 버리곤 했다. 신명이 나지 않는 글쓰기는 내 자신은 물론 독자들에 대한 죄악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손가락을 자른 도박꾼이 다시 도박장으로 돌아오듯 나는 어느새 글쓰기를 즐기고 있었다.
즐거움은 그 어떤 것에의 몰입이며 동시에 그 어떤 것으로부터의 해방을 통한 자기 증대이기도 하다.
상상하는 즐거움이 바로 그것이다. 상상은 기억을 재료로 하여 관념적인 것을 구체화하는 힘이다. 특히 내 유년의 각인된 기억은 가상의 그럴듯한 집을 짓는 일에 결정적인 밑천이 되었다.
유년의 눈을 통해 내 속에 갇힌 6·25의 악령은 그 출구를 찾아 광기 어린 눈을 번들거렸다. 그 광기의 악령을 내 속에서 몰아내지 않으면 안된다는 당위 명제로 글쓰기의 심지를 삼았다.
어느 여름날 소설 쓰기에 몰두한 나를 향해 아내가 볼멘 소리를 던졌다.
뭔 거짓말을 만드느라 그렇게 땀까지 뻘뻘 흘리고 그래요? 몇 번의 면회 사절로 심기가 불편한 아내의 그 말은 충격적이었지만 사실 그것은 맞는 얘기였다. 그 어떤 명분도 거짓말 이야기를 만드는 즐거움에 앞설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 잘난 상상력 부리기의 명분 찾기에 안간힘을 썼다. 거짓말 왜 하는가. 믿게 하기 위해서. 무엇을 믿으란 말인가. 내가 보여주고 싶은 새로운 의미, 새로운 가치, 새로운 질서. 그리고 새로운 표현방식. 작가로서 이 정도의 자기 암시는 필요하지 않느냔 자위로 작가 체면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어떻든 글쓰기의 즐거움이 나를 구원했다. 열등감 체질인 나는 다른 아이들보다 그 정도가 심했다.
그렇게 감수성이 예민했다는 뜻이다. 남들한테는 별 것 아닌 일도 나한테는 치명적이었다.
중학교 때는 다른 아이들보다 책을 많이 읽었다는 자위로 세상이 살 만했다. 그러나 고등학교 때 문예반에 들어가면서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다.
어휘력 부족, 형편없는 문장력의 확인이었다. 그때부터 내 치부를 감추기 위한 싸움이 시작되었다. 장인 기질의 자기 연마를 통해 글쓰는 즐거움을 터득하게 되었던 것이다.
시골 촌놈의 서울에서의 대학 생활은 참담했다. 몇몇 문우의 천부적 재능 앞에 기가 죽었고 이룰 수 없는 짝사랑의 좌절, 그리고 도무지 마음에 심지를 세울 수 없는 혼란한 현실의, 내가 감당하기 어려운 높은 벽 앞에 압도당했다.
다른 방법은 생각할 수 없었다. 글쓰기가 유일한 출구였다. 불편하면 편하게 하라. 다행히 내 열패감이 생각보다 쉽게 창조적 에너지로 바뀌면서 일단 꿈의 등용문 앞에 설 수 있었다.
그렇게 문학이 나를 구원하곤 했지만 나는 번번이 문학을 배반했다. 글쓰는 즐거움을 쉽게 잃어버렸던 것이다.
반성이라는 미명 아래 쓰레기 같은 자기 일상이나 까발리고 호시탐탐 남의 삶을 훔쳐낸 뒤 같잖은 의미 부여로 거드름을 떠는, 나를 비롯한 동업자들의 그 탐욕의 내숭이 징글징글하게 느껴질 때 나는 쉽게 글쓰는 즐거움을 버렸다.
버렸다기보다 버려졌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그것은 또 다른 열등감의 발현이었다. 문학에 대한 심통 부리기는 내 안의 뭔가가 무너져내리고 있음을 의미했다.
책임지지 못하는 반성의 남발, 그것은 정직성의 실종이었다. 그리고 글쓰기로 채워지지 않는 탐욕의 항아리. 한 가닥 양심이 나를 문학으로부터 격리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전업작가가 되지 못한 결정적 원인이다. 글쓰기의 즐거움을 잃어버린 내가 찾아가는 곳은 학교 교실이었다.
자유분방한 욕구의 분출에 적합한 것이 글쓰기라면 교직은 음충맞은 내 내면의 방황을 감추는 보호색으로서 최적이었다. 어릴 때의 유일한 꿈이 선생님이 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에서 어느 정도 보람도 찾을 수 있었다.
글쓰는 일과 달리 교직은 화해와 관용의 집이었다. 또한 교직은 글을 쓰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는 생활의 방편이기도 했다.
문제는 교과서적인 삶에 오래 안주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교직 생활에 대한 회의는 그 주기가 글쓰는 일의 그것보다 더 잦았다.
내가 쓰고 있는 탈 안의 또 다른 불량스런 내 얼굴이 욕구불만으로 이글거렸다. 그 안에서는 꿈을 꿀 수가 없었다.
매사가 시큰둥하거나 파행으로 치닫고 있는 우리의 형편없는 교육현실에 대한 불만으로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신명을 잃으면 도망치기, 그것이 내 특기였다. 그렇다고 잃어버린 글쓰기의 신명을 당장 되찾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두 개의 길 말고, 오솔길 같은 완충지대가 필요했다.
자연 친화였다. 내가 선택한 두 길에서 어느 것 하나에 싫증을 느끼거나 회의가 올 때 쉽게 도망칠 수 있는 또 다른 길이 거기 있었다. 나는 거침없이 감동했다.
온통 덧셈뿐인 자연과의 만남은 내 감성대로 살고 싶은 욕구의 충족, 충만한 위안이었다. 산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졌고 언제부터인가는 죄스럽게도 밭농사하는 즐거움까지 누리게 되었다.
자연 앞에서 내 탐욕과 오만은 빛을 잃었다. 자연은 비우기의 충만을 가르쳐주었다. 자연 사랑은 사람들 곁에 온전한 마음으로 돌아가기 위한 마음 비우기와 다르지 않았다.
말갛게 비워진 상태에서 나는 비로소 글쓰기의 즐거움을 그리워했다. 그 꿈의 실현을 위한 겸손과 감사도 배웠다.
달라지는 세상보다 내가 더 앞서 나가고 있다고 생각하던 시절도 있었다.
내 글쓰기가 기존의 덕목 깨부수기이며 새로운 유파의 시작이고 그 중심이라는 오기와 자만으로 번뜩이던 젊은 날, 가벼운 것과 무거운 것의 구별이 분명했고 새롭지 않은 것에 대한 깎아내리기에 매몰찼다.
문학이 치기도 객기도, 더구나 먹고 사는 방편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그 엄숙한 명제를 글쓰기의 신명으로 자랑삼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나는 어디쯤 있는가. 세상보다 더 수다스러워졌고 내 문학을 앞질러 낡아버렸다.
지난 날 가벼이 본 것이 무겁게 다가오고 엄숙하게 움켜쥐었던 중심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가치의 혼란 앞에 흔들린다. 가지고 있는 것 지켜내기만도 벅차다며 새로워지려는 노력을 쉽게 포기한다.
맞는 얘기다. 세상 따라 달라지려고 허둥댈 것이 아니라 더 이상 무너지지 않기 위한 준엄한 자기 점검, 그 각성이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자중하기로 한다.
무엇보다 명심할 일은 항상 나보다 앞서 있는 내 독자들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고문하듯 다시 묻는다.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곁들여, 아름다운 우리말의 전수….
그러나 내가 두려워하는 독자들이 냅다 나를 윽박지른다.
그건 오직 당신 작품으로 말해야 하는 것이라고.
●연보
▲1940년 강원 홍천 출생
▲1963년 경희대 국문과 졸업
▲196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동행'당선 등단
▲1972~84년 경희고 교사
▲1985~현재 강원대 국문과 교수
▲단편집 '바람난 마을''아베의 가족''우상의 눈물''하늘아래 그 자리''우리들의날개''형벌의 집''지빠귀속의 뻐꾸기''사이코'장편'길''유정의 사랑''늪에서는 바람이'불타는 산'등
▲현대문학상(1977)동인문학상(1980)윤동주문학상(1989)김유정문학상(1990)한국문학상(1996)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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