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몬느 보봐르의 ‘제2의 성’ 출간은 여성 운동사에서 하나의 혁명이었다. 내용은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는 유명한 구절로 요약된다. 여성의 경제적 독립을 주장하고 모성의 신비를 벗기면서 낙태자유를 주창한 이 책은 왜곡된 여성성을 신랄하게 파헤쳤다. 1949년에 나온 이 책은 수십 개국에서 번역되어 양성 평등의 뜨거운 메시지를 전파했다.<사람은 여자로 태어나지 않는다. 만들어지는 것이다. 인간의 암컷이 사회에서 취하는 형태는 생리적.심리적.경제적 숙명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문명 전체가 수컷과 거세체와의 중간물을 만들고 여성이라는 이름을 붙였을 뿐이다.>사람은>
유엔이 발표한 지난해 한국의 여성권한척도(GEM)는 64개국 중 61위로 바닥권이다. 여성의 정치경제 활동과 정책결정 참여도를 나타내는 것이 GEM이다. 주요 항목인 행정관리직 여성 비율도 5%에 머문다. 미국(45%) 영국(33%) 노르웨이(31%) 스웨덴(29%) 호주(25%)와는 비교가 안 되고, 일본(9%)에도 크게 떨어진다.
20세기는 여성이 각 분야에서 부상한 대약진의 시대였고 ‘제2의 성’이 그 운동에 기름을 부었으나, 우리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은 좀처럼 탄력을 받지 못했다. 우리 여성의 사회 활동은 개발도상국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정치뿐이 아니다.노동시장에서도 차별대우를 받고 있다. 여성 근로자의 70%는 임시ㆍ일용직 근로자로서 법의 보호도 제대로 받지 못한다.
직업계층 상층부는 남성이 차지하고 여성은 하층부에 머물러 있는, 노동시장의 이중구조가 엄존한다.또 고학력 여성은 20대에 높은 경제활동을 하다가 30대 이후 급락하고, 저학력 여성은 30대 이후 많이 직장을 찾는다.한국인 대부분이 이 현실적 참담함을 알고 있으면서도, 여성이 두 계층으로 분리되는 비극상에 길들여져 있다.
헌정사상 처음 여성 총리서리가 탄생했다. 크게 기뻐하던 여성계는 곧 이어 간단치 않은 현실과 마주친다. 여성의 들뜬 기쁨을 비판의 차가움이 지우고 있다. 장 상 총리서리의 아들 국적문제, 친일행적이 있는 김활란 상 제정 추진, 아파트 불법개조까지 여러 건이 비판되고 있다. 사실 신학을 전공하고 기독교학과 교수를 지낸 그에게서, 신학자 다운 경건함보다 세속적 이미지가 잇달아 드러나 실망스럽다.
‘마당발’ ‘여장부’라는 표현은 맞아도 ‘도덕주의자’ ‘원칙주의자’라는 수사도 그에게 어울리는지 회의가 든다. 그는 어느 의원의 실언처럼 “명문학교를 나온, 좋은 가문 출신의, 훌륭한 경력을 지닌 사람”에 해당할 것이다. 그가 이른바 명망가에게 요구되는 노블리스 오블리제에 성실했는지 선뜻 신뢰가 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사청문회에서 여러 의구심이 잘 걸러졌으면 좋겠다. 또 국정수행과 관련된 뛰어난 역량과 성실한 가치관이 드러나 국민적 공감을 얻기 바란다.
그 뒤의 국회 임명동의는 두 개의 가치가 부딪치는 자리가 될 것이다. 열악한 한국의 여성현실을 혁파할 상징적 인물이라는 가치와, 우월한 신분에 따르는 도덕상의 의무를 다 했는지를 판별하려는 가치가 만나게 될 것이다.
1977년 노벨의학상 수상자인 로절린 얄로는 사무실에 이렇게 써놓고 살았다.‘무슨 일을 하든지 여성이 남성의 절반 만큼 대접 받으려면, 남성의 두 배 이상 잘 해야 한다.’ 행정관리직 여성 비율이 한국보다 9배나 높은 미국의 엘리트 여성 좌우명도 이러했다니, 아득한 느낌 뿐이다.하여, 중차대한 흠이 없는 한 장 상씨에 대한 사소한 자질논박에 앞서,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임명동의에 관대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우리 여건에서는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도 당당한 이유와 주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박래부 논설위원parkrb@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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