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복 전 복지부 장관의 교체와 관련한 논란이 증폭되고 있다.이 전 장관의 경질이 청와대측의 주장대로 그의 업무 스타일 때문인지 아니면 그가 추진했던 정책에 반대하는 집단, 즉 제약회사의 영향력이 작용한 결과인지에 관한 것이다.
장관의 임면권자인 김대중 대통령이 이태복 장관의 업무스타일이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하였다면 업무 스타일의 어떠한 부분이 문제가 되었는지 꼬치꼬치 캐물을 수는 없다.
그러나 정책추진 과정에서 불거진 이해 당사자들의 영향력에 의해 장관이 경질되었다면 이는 국가의 권위와 위신에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 이해당사자가 정책에 반대하든 찬성하든 대다수 국민의 이해를 대변하고 있다면, 찬반 주장을 수렴하고 조정하는 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부처의 공정성과 투명성 문제를 포함한 장관의 업무 스타일을 문제삼을 수 있다.
하지만 이해당사자인 다국적 제약회사와 미 무역대표부, 그리고 미 상무부의 압력에 의해 ‘건강보험 재정안정대책’의 세부과제로 제시되었던 참조 가격제가 시행되지 못하고, 더 나아가 장관의 경질에까지 영향을 주었다면 그 경위에 대한 철저한 진상조사가 필요하다.
이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외국기업이나 외국정부의 영향력 행사로부터 국가의 기본적 영역을 지켜 나갈 수 있는 법적·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다.
외국 로비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이 수립되지 않은 상황에서 제2, 제3의 로비파문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신자유주의의 지구촌 시대에 외국로비는 모든 국가에서 일어나는 보편적인 현상이다.
냉전시대에는 미국이 외국 로비의 주된 대상이었으나 상호의존의 국제 정치경제체제에서 모든 정부와 다국적 기업들은 그들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타국의 정책결정에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정식 외교채널을 통한 교섭을 꾀하는 한편, 막대한 자금을 동원하여 법률회사, 컨설팅회사, 광고회사 및 유력 인사 등을 로비스트로 고용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정책 결정 과정에서도 다국적 기업과 외국정부의 로비활동이 일상화되어 있다.
최근의 차세대 전투기 구입 결정 과정에서 볼 수 있었던 전투기 제작사와 외국정부의 로비가 그 좋은 예다. 이번 다국적 제약회사와 미국 정부의 로비 활동도 같은 범주로 볼 수 있다.
이제 외국의 정부기관이나 기업들이 우리나라의 정책 결정 과정에 직접간접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데 대해 능동적인 자세로 임해야 한다.
외국의 로비가 피할 수 없는 현상이라면 로비의 긍정적 측면을 극대화하고 로비절차를 합리화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우선 정부는 음성적 방법을 통한 외국의 영향력 행사를 양성화시키기 위해 가칭 ‘외국로비스트 등록법’ 제정을 숙고해야 한다.
외국로비스트들의 활동을 양성화하면 무절제한 행동으로 우리의 정책 결정 과정이 흔들릴 것이라는 염려도 있을 수 있으나, 이는 효율적인 법적 규제조치로서 충분히 예방할 수 있다.
즉 누가 누구의 이익을 언제 어떻게 대변하고 있는가를 항상 감시·통제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면 불법적 선전과 압력, 불법 로비활동, 뇌물수수 등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
외국로비스트 등록법은 로비활동을 규제하는데 일차적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외국의 로비 실상을 국민이 손쉽게 알 수 있도록 하는 장치이므로 부수적으로 우리 사회와 정책 결정 과정의 투명성도 높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사실 법과 제도적 장치는 불법적이고 과도한 외국로비를 막을 수 있는 필요조건에 불과하다. 우리의 정책 결정 과정이 투명하고 합리적일 때 필요충분조건이 갖추어지는 것이 아닐까.
불법적이고 편파적인 로비는 어둡고 침침한 정책과정에서 가능하다. 습습하고 어두운 골방에서 곰팡이가 피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정희 한국외대 정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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