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먹지 않으면 먹힌다"위기감, 최근 2~32년새 합병은행 급증영국 런던 중심부의 금융가 ‘주얼리 스트리트’. 바로크 양식의 고색창연한 빌딩들 사이로 HSBC, 로이즈TSB, 바클레이즈, 로열뱅크 오브 스코틀랜드, 커머셜유니온 등 세계 유수은행의 본점 간판들이 즐비하다.
세계 금융산업의 메카로 통하는 이곳에 둥지를 튼 이들 은행의 공통점은? 한결같이 최근 2~3년 사이에 공격적인 인수합병(M&A)을 통해 몸집을 키워온 ‘합병은행’이라는 점이다. “대부분의 유럽 은행들이 ‘먼저 먹지 않으면 먹힌다’는 위기감에 사로잡혀 있다.
일단 규모부터 키워놓아야 적대적 인수합병의 사정권에서 벗어날 수 있는 시대다.”세계적 컨설팅사인 매킨지의 금융담당 선임 컨설턴트 매트 베키어(38)씨의 진단이다.
■‘골리앗’만이 살아 남는다
요즘 유럽 금융시장의 최대 화두는 ‘통합(Consolidation)’이다. 유로 단일 통화권의 확대로 국가간 금융 장벽이 낮아지면서 합병을 통한 시장지배력 강화가 절체절명의 과제로 부상하고 있다.
국경을 초월한 은행간 인수합병이 늘어나면서 “클수록 안전하다”는 인식이 빠르게 확산중이다. 1995년 군소은행인 로이즈와 TSB의 짝짓기를 통해 탄생한 영국 로이즈TSB은행은 합병후 4년여 만에 총자산 1,760억 유로, 지점수 2,400개로 영국내 랭킹 3위 은행으로 발돋움했지만 올해 다시 본격적인 인수전에 뛰어들었다.
개인금융서비스 부분을 강화하기 위해 영국내 장기 주택금융분야 2위 은행인 애비 내셔널에 눈독을 들이고 있는 상태.
1999년 산탄더은행(BS)과 센트럴 히스파뇨은행(BCH)의 통합으로 탄생한 스페인 최대 은행인 BSCH는 합병 이후에도 중남미 등지에서 무려 8건의 M&A를 추진하는 등 몸집 불리기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지속적인 인수합병을 통해 2000년 말 현재 총자산 3,489억 유로, 고객수 3,500만명으로 유럽 2위, 세계 30위로 껑충 뛰어올랐다.
최근에는 독일 코메르츠은행, 영국 로열뱅크 등 유럽 각국의 대형은행들과 잇따라 지분교환을 통한 전략적 제휴를 체결, 유럽 랭킹 1위 금융그룹인 HSBC를 바짝 추격하고 있다.
유럽 각국 은행들의 이 같은 덩치 불리기에 힘입어 금융시장의 ‘과점화’현상은 갈수록 심해지는 양상이다.
프랑스 최대의 금융그룹인 BNP파리바의 내부자료에 따르면 2001년 말 현재 각국 상위 5대 은행이 차지하는 국가별 시장점유율은 네덜란드의 경우 무려 83%에 달했고 스페인 51%, 이탈리아 50%, 영국 46%, 프랑스 41% 등의 순으로 나타났다.
■‘대형화+겸업화’로 승부한다
유럽 금융시장 재편의 또 하나의 현상은 ‘겸업화’이다. 은행간 단순 합병이 아니라 기업전문은행과 모기지은행, 투자은행과 상업은행, 은행과 증권, 은행과 보험 등 업태의 영역을 초월한 겸업형 통합이 대세를 형성하고 있다.
은행과 보험회사, 증권회사, 투신사 등을 자회사 형태로 한데 묶어 각 자회사의 상품을 교차판매(Cross-Selling)하는 금융지주회사 방식이 대표적 예다.
금융지주회사 체제 하에서 은행은 주로 다른 자회사들이 만든 각종 금융상품을 판매하는 ‘슈퍼마켓’의 역할을 맡게 된다.
고객 입장에선 은행 창구 한 곳만 찾아도 모든 업무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원스톱 뱅킹’이 가능하고, 은행입장에선 고객정보나 전산, 인력자원 등을 효율적으로 관리ㆍ배분함으로써 합병 등 경영환경의 변화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는 게 강점이다.
BNP파리바 관계자는 “금융의 증권화, 기업의 탈은행화 현상으로 전통적인 예금 대출업무로 벌어들이는 수익이 크게 줄어들자 많은 은행들이 금융지주회사 시스템에 눈을 돌리고 있다”며 “앞으로는 대형화와 겸업화를 동시에 추구하는 은행만이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런던ㆍ파리ㆍ마드리드=변형섭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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