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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548) 페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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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548) 페탱

입력
2002.07.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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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7월23일 프랑스의 군인 겸 정치가 앙리 필리프 페탱이 되섬(島)에서 복역 중에 사망했다. 95세였다. 20세기 프랑스사에서 페탱 만큼 운명의 극적 변전을 보여준 인물도 달리 찾기 어렵다. 페탱은 프랑스의 영웅이자 반역자였다. 제1차 세계대전때 그는 영웅이었고, 제2차 세계대전 때 그는 반역자가 되었다.페탱은 생시르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대학 교관을 거쳐 제1차 세계대전에 대령으로 참전했다. 그 전까지 인류가 경험하지 못한 이 커다란 전쟁을 통해서 그는 군사 지휘관의 재능을 입증했다. 독일군이 패퇴할 때마다 페탱은 빠르게 승진했고, 전쟁이 4년 만에 끝났을 때 그는 프랑스의 육군 원수가 되어 있었다. 종전 뒤에도 페탱의 영예는 이어졌다. 그는 1934년에 국방장관이 되었고, 1939년에는 스페인 주재 프랑스 대사가 되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은 페탱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1940년 5월 프랑스가 독일에 점령 당하자 그는 총리로 취임해 독일과 강화조약을 맺었다. 이어 온천도시 비시를 수도로 새로운 프랑스 정부를 수립했다.

그 전까지 ‘프랑스 공화국’으로 불렸던 국호를 ‘프랑스 국가’로 바꾼 비시 정부는 프랑스 혁명의 이념인 ‘자유ㆍ평등ㆍ우애’를 ‘노동ㆍ가족ㆍ조국’으로 대치한 파시스트 정권이었을 뿐만 아니라, 본국 영토의 3분의 2를 독일 점령군에게 헌납한 외세 예속 정권이었다.

페탱은 제3공화국의 헌법을 폐지하고 새 헌법을 반포해 이 반(半)주권 국가의 주석이 되었다. 새 헌법은 국가주석에게 행정ㆍ입법의 전권을 부여하고 의회의 기능을 정지시켰다. 페탱은 공산당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며 대자본가의 지지와 독일의 협조 속에서 프랑스의 껍데기를 유지했으나, 종전 이후 각료 전원과 함께 반역죄로 기소되었다.

고종석편집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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