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정운찬(鄭雲燦·56) 신임 총장은 22일 취임 인터뷰를 통해서도 “지배하는 총장이 아니라 봉사하는 총장이 되겠다”고 거듭 밝혔다.탈 권위형의 민주적 이미지로 그는 총장 선거에서 동료교수들의 압도적 지지를 이끌어냈다. 이날 서울대 본관 4층 소회의실에서 마주한 그의 말투는 여전히 낮고 잔잔했지만 오랫동안 깊이 생각해온 듯 총장으로서의 만만치 않은 자신감이 엿보였다.
_ 1998년 한국은행 총재를 비롯, 여러 번 공직 제의에도 응하지 않다가 서울대 총장직에 도전한 계기는.
“서울대는 25년 동안 직장으로 다녀 일생의 반 이상을 보낸 곳이다. 서울대가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가만있으면 책임회피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에서 권유도 많았다.
서울대를 운영하는 것이 한국은행을 맡는 것보다 훨씬 어려울 것이다. 피터 드러커는 대학을 잘 운영할 수 있으면 다른 모든 곳도 잘 할 수 있다고 할 만큼 대학은 매우 복잡하고 다양한 이해가 엇갈리는 곳이다.”
_ 말 한대로 서울대 위기론이 팽배해 있다. 그에 대한 견해는.
“사회가 서울대에 기대하는 수월성을 충족시키지 못한 것이 위기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연구분야의 경우 예전에는 외국의 지식을 전하는 일로 역할을 다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지식 전수에서 끝내지 않고 새로운 지식인을 창출해야 한다.
연구실적은 말할 것도 없다. 이과 부분의 연구실적이 세계 40위로 평가받았지만 그 자체도 만족스러운 것이 아니다.
교육부문도 마찬가지다. 이런저런 이유로 연구를 많이 해야된다는 강박관념으로 과거에 비해 교육에 시간을 덜 쏟는 경향이 있다.
전국에서 뛰어난 학생들이 많이 모이지만 과연 지성인으로 배출되는지는 솔직히 자신이 없다. 막스 베버가 말한 비지성적 전문가들만 양성하는 것은 아닌가 염려스럽다. 봉사라는 측면도 우려스럽다.
빌헬름 레프케는 ‘휴머니즘의 경제학’이란 저서에서 나라의 장래가 아무리 암담하더라도 세가지 부류의 사람이 자신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이상 희망은 있다고 썼다. 학문을 탐구하는 학자, 법을 지키는 법관, 여론을 주도하는 언론인이다.
우리나라에서 이 세 부류의 사람이 자신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지 의문이 듭니다. 특히 대학, 그 중에서도 서울대가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싶어 부끄럽다.
_ 일각에서는 서울대 망국론, 또는 폐교론까지 나오는 상황인데.
“앞서 얘기한대로 서울대가 사회의 기대에는 못 미치면서도 과거와 같은 특권은 계속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다른 좋은 대학도 많다. 미국의 경우도 우수한 대학이 많아지면서 아카데미 시장과 함께 교수의 실력이 향상됐다.
대학개혁과 맞물린 것이지만 서울대와 대등한 우수한 대학들이 더 많이 만들어져야 한다. 하지만 서울대를 폐교하라느니 서울대가 나라를 망친다는 논리는 생산적인지 못하고 별 근거가 없는 감정적인 주장이다.”
_ 총장의 개혁성향에 대한 학교 안팎의 기대가 매우 크다.
“두드려 부순다고 개혁이 되는 것은 아니다. 개혁은 곧 정상화다. 지금까지 비정상적이었던 것을 정상으로 만들어 놓겠다는 뜻이다.
무엇보다 서울대 총장으로서의 원칙과 명예를 소중히 여기겠다. 내부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민주적인 의사소통체계를 확립하겠다. 또 모든 것을 투명하게 밝히고, 재정확보를 위해서 발로 뛰는 총장이 되겠다.”
_ 정원감축, 무리한 학부제 시행이 서울대를 흔드는 결과를 낳았다고 했는데 이는 교육부 정책과는 반대되는 의견이다.
“서울대 혼자서는 존재할 수는 없다. 우리 사회의 다른 부분과 의논하고 협력해야 한다. 정원이나 모집단위 문제는 각 단과대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해서 교육부와의 의논과 협력을 거쳐 적극적으로 풀어 나가겠다.”
_ 인문학이 위기라는 목소리도 크다. 전임 총장 때는 기초학문 홀대로 내부 갈등이 빚어지기도 했는데.
“서울대의 각 구성 요소들이 균형적으로 발전하도록 이끌겠다. 하향평준화가 아니라 기초학문이나 상대적으로 소외받는 학문을 보호하고 지원하는 균형유지다.
기초학문분야의 연구 지원도 확충하겠다. 서울대는 어떤 의미에서 학문의 종자보관소와 같은 곳이다. 성찰을 중시하는 인문학, 실험을 중시하는 응용과학 모두가 진리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같다.
기초학문과 응용학문의 이분법적 논의를 자주 접하지만 기초학문이 없으면 응용학문은 사상누각이고, 응용학문이 없으면 기초학문의 빛이 바래는 법이다.”
_ 공룡처럼 비대해진 서울대가 백화점식으로 모든 학문을 포괄해야 하느냐는 지적이 많다. 기초학문위주로 재편성해야한다는 의미다.
법대, 경영대, 의학전문대학원을 도입하면서 학부제를 폐지하자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제기되는 것인데.
“법대, 경영대, 의학 전문대학원은 장기적으로 바람직하지만 현재로서는 전혀 준비가 안돼 있다. 사회도 마찬가지로 준비가 안돼있다고 생각한다.
또 해당 대학에서 죽어도 못한다고 한다면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서울대가 너무 많은 학과와 연구소를 가지고 있고 이를 정리해야한다는 의견에는 공감한다.
이것도 역시 소속 인원들의 의견을 반영해서 바람직한 방향으로 유도해야지 일순간에 바꾸는 것은 옳지 않다. 하지만 인기 학과를 시장에 맡기고 아예 포기하라는 식에 대해서는 반대한다.”
_ 연봉계약제 도입으로 교수사회가 뜨겁다. 교수사회의 경쟁체제 도입에 대해서는.
“발전을 하려면 경쟁이 있어야 한다. 개인적으로도 연봉제에 찬성한다. 하지만 서울대 교수들의 보수가 극히 낮은 현 상황에서 현재 재원만으로 연봉제를 하면 지금보다 더 작게 받을 가능성이 크다. 연봉제는 가능하지만 현 재원을 확충하지 않은 상황에서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말이다.
연봉 계약제를 교수 사기와 연구분위기를 진작시키는 의미로서 활용해야지 해고에 목적을 두는 것은 잘못이다. “
_ 서울대 총장선거가 패거리주의 등 정치판을 닮아간다는 비판이 있다.
“1인 2표제 같은 것은 다른 곳에서 찾아보기도 힘든 선거제도다. 약속한대로 조만간 총장선거제도 개선위원회를 만들어서 6개월이내에 안을 만들겠다. 직선제를 포기하는 것도 포함, 모든 가능한 대안을 검토하겠다.”
_잇단 총장실 점거로 학생회장이 퇴학조치를 받는 등 학생들과의 문제가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다. 학생들과의 의사소통을 문제는.
“학생들의 의견 개진은 적극적으로 권장할 생각이다. 자신의 의견을 분명하게 발표하는 것은 장래 지도자의 리더십을 쌓는 일이다. 물론 그 방법이 불법적이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의견개진을 넘어 학교 운영에 직접 참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이다.”
_ 이수성(李壽成) 전 총장은 재임 때 총리로 입각하면서 중도에 그만두었다. 정 총장에게도 총리 제의가 들어온다면.
“그런 일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설사 그렇더라도 밖으로 나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평교수때도 안 갔는데, 총장이 뭐하러 가겠느냐. 뽑아준 분들의 믿음을 저버리지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_ 그럼 총장 역임 후에는.
“스승인 조순(趙淳) 선생님께서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니 내일 무슨 일을 할지 말하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학교를 떠나고 싶은 마음이 없다.
송용창기자
hermeet@hk.co.kr
■약력
-충남공주
-경기고, 서울대 경제한과
-미 프린스턴대 경제학 박사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한국금융학회 회장, 재경부 금융발전심의회 위원장, 국민연금발전위원회 위원장
■정운찬 총장시대 서울대/민주적 의사결정 강조 예산확보가 개혁관건
일찌감치 '서울대 개혁론'을 주장해온 정운찬 총장은 이미 지난 주 ‘개혁의 신호탄’을 쏘며 새 바람을 예고했다. 유세기간 밝힌 총장공관 철거를 약속대로 이행하겠다고 밝힌 것.
정 총장은 무주택 교수를 위한 장기 임대아파틀 건립을 위해 총장 공관 부지와 교수아파트 부지를 재개발하겠다고 말했다.
서울대 안팎에서 가장 큰 주목을 받는 부분은 기초학문 육성. 정 총장은 유세기간 기초학문과 소외학문 보호육성을 천명했다.정부의 사업인 두뇌한국(BK)21 사업에서도 소외됐던 인문, 사회대 교수들에겐 더 없이 반가운 소식이다. 인문대의 한 교수는 “총장의 전폭적 지원으로 땅에 떨어진 ‘지성의 권위’가 조금이나마 회복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민주적 의사결정구조에 대한 강조도 눈여겨 볼 대목. 이기준 전임 총장의 가장 큰 실패이유는 개혁 드라이버의 방향성에 있기 보다는 총장의 독단적 태도에 있었다는 것이 서울대 관계자들의 평가다. 하지만 서울대 교수들은 각기 고집스런 학문적 자존심을 갖고 있어 그들의 의사를 결집하는 일이 쉽지 않다. 따라서 다양한 교수들의 견해를 어떻게 합리적으로 조정할 수 있는지에 정 총장 리더십의 성패가 달려있다.
이밖에 당장의 현안으로 1,000억원의 교수 복지기금 조성 계획과 연구지원비 확충 문제가 있다.학교의 자율성을 유지하면서 더 많은 국가예산을 확보하는 것 역시만만한 일이 아니다.
죽마고우인 장성우(張承玗) 기획예산처 장관을 비롯, 그의 폭 넓은 인간관계가 한몫을 할지도 흥미로운 대목이다.
송용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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