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에는 구청 공무원으로, 밤에는 야학 교사로…’하루 일과가 끝난 오후 6~7시. 보통 직장인들은 앞 다퉈 귀가전쟁을 벌이는 시각에 박용준(43ㆍ중랑구청 총무과 9급 운전직)씨는 제2의 직장인 동대문구 휘경동 상록야학으로 향한다.
하루종일 자동차 운전대와 씨름 하느라 몸은 피곤하지만 야학으로 향하는 마음은 가볍기만 하다.
중랑구청에서 각종 공무용 자동차를 운전하고 있는 그는 1993년 이후 10년째 야학교사 생활을 하고 있다.
매주 수ㆍ목ㆍ금요일 밤마다 100여명의 학생들에게 국어 도덕 문학 등을 가르치고 있다.
특히 문학에 대한 관심이 많아 상록야학의 교지인 ‘푸른 그루’와 ‘월간 우리들의 이야기’의 편집에 참여하고 있다.
그 동안 그가 가르친 야학 제자는 10대 청소년에서 50대 주부까지 수백명에 이른다. 이들은 그의 제자이지만 직속 후배들이기도 하다.
그도 89~93년 이곳에서 공부한 상록야학 출신이기 때문이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초등학교만 졸업한 뒤 집안 농사일을 돕던 그는 20세 때인 79년 고향인 충남 서산을 떠나 무작정 서울로 상경했다.
공사장 인부와 배관공, 보일러 수리공 등 아무 일이나 닥치는 대로 해야 했던 그는 버스 운전기사로 일하던 89년 봄 중구청 기능직에 응시, 합격하면서 국가 공무원에 임용됐다.
결혼 후 자녀를 두면서 생활은 안정돼 갔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에는 못다한 학업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었다.
고심하던 그는 퇴근길 우연히 전신주에 붙어있는 야학 학생모집 포스터를 보고 또 다른 인생을 설계하게 된다.
“너무 늦은 것이 아닌가”하는 의구심도 들었지만 당시 그의 열정으로 극복하지 못하는 장애는 없었다.
그는 그 길로 야학을 찾아가 등록했고, 주경야독 끝에 91년과 93년 중ㆍ고교 검정고시를 잇달아 통과했다. 94년에는 서울산업대 문예창작과에 입학, 장학생으로서 98년 졸업했다.
어려운 인생이었지만 그는 자신이 받을 것을 남에게 주는 것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상록야학을 졸업하자 마자 곧바로 야학의 교사생활을 자청했고 오늘날 까지 학생들과 동고동락하고 있다.
야학 선생으로서 그는 학생들에게 항상 많은 것을 배운다고 생각한다.
“배움을 열망하는 초롱초롱한 눈빛들을 보면 알지 못하는 사이에 때묻은 나 자신을 반성하게 합니다.”
그는 어렵지만 건강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기쁨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의 꿈은 글을 쓰는 것이다. 중앙 일간지 신춘문예에 번번히 떨어지곤 했지만 언젠가는 당선될 것이란 믿음을 갖고 있다.
“항상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고 싶다”는 그는 조용히 제자들이 있는 야학으로 향했다.
염영남기자
liberty@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