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천년 견오백’(紙千年絹五百)비단의 수명은 500년인데 한지(韓紙)는 1,000년에 이르는 생명력을 지녔다는 말이다. 귀한 비단보다도 가치가 있다고 인정 받았던 한지 중에서도 전주 한지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명품이었다.
조선 초 전주 조지소(造紙所)가 생산한 전주 한지는 왕실에 진상 됐고, 명ㆍ청의 공물로도 바쳐졌다. 99번의 정성스러운 손길을 거쳐야 만들 수 있는 전주한지는 조선이 자랑한 그윽한 문화상품이었다.
그처럼 수백년간 사랑 받았던 전주 한지가 최근 맥이 끊길 위기에 처했다. 전주 한지는 현재 국내 화선지, 서예지 시장에서 70%의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지만 전통을 입에 담기 부끄러울 정도의 조악한 품질 때문에 제값을 받지 못하고 있다.
또한 저가품 시장은 중국에, 고급지는 일본에 각각 시장을 빼앗겨 설 자리를 잃고 있다. 이 같은 어두운 현실때문에 1940년대 초 500여 개에 달하던 전주 한지 공장은 지금은 20여 곳만 남아 있다.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업체들의 장래도 지금 같아서는 암울하기 그지없다.
전주 한지의 명성만을 믿고 기술ㆍ품질개발을 소홀히 한 한지 업체의 판단 착오와 전주 한지의 가치를 인식하지 못한 행정당국의 방관이 초래한 비극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최근 전주 한지를 살리기 위한 다양한 움직임이 활발하게 나타나고 있어 관심을 모은다. 전주 한지를 살리는 것은 소중한 우리 문화상품의 부활인 동시에 세계화시대에 지역 경제를 활성화할 수 있는 열쇠라는 점을 깨닫기 시작해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전주시는 최근 전북경제사회연구원에 의뢰한 ‘전주한지산업 활성화’에 관한 용역 결과를 바탕으로 전통한지의 복원과 생산, 관련업체의 창업을 효과적으로 뒷받침하는 대규모 ‘한지 테마파크’를 조성하기로 했다.
테마파크에는 한지연구지원센터를 비롯, 특수지 생산동, 한지공예공방, 한지응용 상품관, 장인 주거단지 등의 다양한 시설이 들어설 예정이다. 시는 지난 4월 한옥보전지구에 한지 유물 및 공예품을 전시하는 전주공예품전시관과 한지제품을 판매하는 명품관을 개관하기도 했다.
‘한지문화를 발전시키면 한지산업도 발전한다’는 신념으로 뭉친 한지 관련 전문가 30여명이 지난 5월 발족한 한지문화진흥원은 한지의 현대화와 대중화에 앞장서고 있다.
진흥원은 9월 자매도시인 일본 가나자와(金澤)시에서 전주한지와 한지공예품 전시회를 개최할 예정이다. 연말에는 중국 전시회도 계획하고 있다.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1999년부터 해마다 열리고 있는 ‘전주종이축제’이다.
한지생산자와 한지공예가, 패션디자이너, 교수 등 전문가들이 주축이 돼 열고 있는 이 축제는 잃어버린 한지를 생활 속에서 재발견하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평가와 함께 한지 수요와 일반인들의 관심, 정부의 지원 등을 끌어냈다.
축제기간에는 한지공예작가의 최고 등용문인 전국한지공예대전이 열리고 다양한 창의적 제품이 전시되는 한지생활용품전도 개최돼 한지를 전통문화산업으로 발전시키는 데 든든한 밑거름이 되고 있다.
백옥선(白玉仙ㆍ37) 전주공예품전시관 관장은 “전주한지를 살리기 위해서는 관주도의 요란스러운 이벤트성 행사보다는 장기적인 차원에서의 전략과 체계적인 지원책의 마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전주=최수학기자
shhcoi@hk.co.kr
■서정철 고궁한지 대표
"잠재력 확신 … 아직 늦지 않았다"
“아직도 늦지 않았습니다”
전주 한지의 본산이었던 전주시 평화동 흑석골에서 20년간 한지를 생산하고 있는 서정철(徐廷哲ㆍ41ㆍ사진) 고궁한지 대표는 “전체적인 한지의 수요는 줄었지만 고급한지 시장의 잠재력은 매우 크다”며 “질 좋은 한지로 승부하는 것이야 말로 전주한지의 유일한 살길”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현재의 협동단지 형태에서 벗어나 개인별 가내수공업으로 단일 품목을 생산하는 전통적 생산방식으로 돌아간다면 개성이 넘치는 양질의 한지를 만들 수 있다”고 강조했다. “전주지역에는 유능한 초지공(종이기술자)이 100명도 넘는데도 돈이 없어 다른 일을 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며 “이들에 대한 행정당국의 적극적인 지원이 아쉽다”고도 말했다.
“실제로 전주출신의 초지공을 고용해 색(色)한지를 생산하고 있는 원주의 경우 새로운 한지의 중심지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고 설명한 그는 “전주는 폐수문제로 색한지를 생산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서대표는 인터뷰 말미에 “최근 여러 가지 상황의 악화로 질기고 보존성이 좋은 전주한지의 장점을 살리지 못하고 있다”며 “소비자들의 신뢰를 회복하고 자기 제품에 책임을 지기 위해서는 수록지(손으로 만든 종이)와 기계지 모두에 생산자 표시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최수학기자
shchoi@hk.co.kr
■'전주의 힘' 종이박물관
제지회사인 팬아시아페이퍼(옛 한솔제지)가 사회환원의 차원에서 1997년 만든 팬아시아 종이박물관은 한지의 고장 전주를 알리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하고 있다.
파피루스에서부터 현대종이에 이르기까지 종이의 거의 모든 것을 전시하고 있는 이 박물관은 종이탄생, 전파과정, 원료 및 제작기술의 발달사 등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도록 다양한 사료관을 개설해놓고 있다.
특히 전국에서 유일하게 박물관 안에 설치된 ‘한지재현관’은 관람객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지장(紙匠) 김태복(金泰福ㆍ54)씨가 전통 한지의 제작과정을 그대로 재현하는 한편, 방문객들이 직접 한지를 만들어 가져갈 수 있도록 해 인기를 끌고 있다.
현재까지 박물관을 찾은 사람은 40만 명. 그 중 외국인 방문객도 3만여명에 달해 전주의 명소로 자리잡았다. 개장시간은 매주 화~일요일 오전9시~오후5시. 입장료는 무료이며 20인 이상 단체(초등학교 3년생 이상) 관람객은 전화예약을 하는 것이 좋다. (063)210_8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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