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 한화갑(韓和甲) 대표의 19일 국회 연설은 부정부패에 대한 참회록, 정치와 정책면에서의 탈(脫) DJ선언, 한나라당에 대한 선전포고 등 크게 세 가지 의미를 지닌다.한 대표는 우선 대통령 아들 비리 등 현 정권의 부정부패에 대해 아무 전제나 토를 달지 않고 무조건 사과하고 자책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대통령의 헌법적 권위를 측근들이 사적 욕망의 도구로 악용했다” “사법적 처단 뿐 아니라 역사와 국민의 이름으로 처벌을 받게 될 것”이라는 등 고강도의 표현이 동원됐다.
한 대표는 특히 대통령 보좌진과 사정기관 담당자들의 책임을 정면 거론, 청와대 비서진과 사정기관 고위층의 ‘자리 보전’을 간접 비판했다. 그는 연설 뒤 기자간담회에서 “청와대 비서실과 안기부 수뇌부의 인책을 뜻하느냐”는 물음에 “본인들이 결정해야 한다는 뜻”이라며 이를 부인하지 않았다.
한 대표는 사과와 자책의 전제 위에서 향후 민주당의 진로에 대해 크게 두 가지 방향을 제시했다.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으로부터의 정치ㆍ정책적 홀로서기와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 대통령 후보에 대한 공세가 그것이다.
먼저 한 대표는 ‘제왕적 권력문화’가 부정부패의 근본 원인이라고 주장한 뒤 “민주당이 창출한 정권도 결코 이 문화에서 자유롭지 못했다”며 DJ 정권의 문제점과 한계를 자인했다. 그는 “하지만 민주당은 제왕적 권력문화에서 과감히 탈피하고 있다”며 당정분리 등을 내세워 DJ와의 차별화를 홍보했다.
한 대표는 정책면에서의 탈(脫)DJ 기조도 분명히 했다. 햇볕정책이 지속돼야 한다는 데에는 동의하면서도 “국민 지지가 뒷받침돼야 한다”며 추진 과정에서의 속도 조절 필요성을 거론한 게 대표적인 예이다. “국민의 정부의 성과는 계승하고, 잘못은 과감히 시정해 나가겠다”는 대목은 민주당과 노무현(盧武鉉) 대통령후보의 ‘사안별 정책 차별화’원칙을 가감 없이 표현한 것이다.
이 같은 정권 내부에 대한 총체적 성찰을 디딤돌 삼아 한 대표는 이회창 후보의 5대 의혹을 직접 제기하는 것으로 사실상 한나라당을 정면 겨냥했다. 민주당은 당장 이날 낮 최고위원회의를 열어 이 후보의 의원직 사퇴를 공식 요구하는 것으로 포문을 열었다. 이번 임시국회와 8ㆍ8 재보선 정국, 더 나아가 대선 국면에서 결코 호락호락 밀리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한 대표는 포스트 월드컵 위원회 설치 등 몇 가지 정책 제안도 내놓았지만 정치적인 메시지가 워낙 강해 상대적으로 빛이 바랬다.
신효섭기자
hsshin@hk.co.kr
■한화갑 대표 국회 대표연설 요지
▼대통령 아들 비리
대통령 측근의 어처구니 없는 비리 행각을 미리 막지 못한 나와 민주당은 국민의 어떤 질책도 달게 받겠다. 비리 당사자들은 사법적 처단 뿐만 아니라 역사와 국민의 이름으로 처벌 받게 될 것이다. 우리는 지금 잘못된 제왕적 권력 문화의 청산을 위해 결단을 내려야 한다. 민주당은 당정 분리 등 엄청난 당 개혁을 하는 과정에서 시행착오와 당장의 정치적 손해가 있더라도 기필코 개혁을 성취해 나갈 것이다.
▼대북 포용 정책
6월29일 우리는 또 북한으로부터 배신 당했다. 대북포용정책은 분명히 시대적 요구였으나 지금은 이 정책의 진정한 성공을 위해 국민의 지지를 모으는 일이 더 중요한 과제이다. 북한은 서해교전에 대해 사과하고 재발 방지를 약속해야 한다.
▼이회창 후보 5대 의혹
대통령 후보에게 쏟아지는 국민적 의혹과 흠결을 덮어둔 채 국민에게 미래의 지도자를 선택하게 할 수는 없다. 그런 점에서 국세청을 동원해 선거자금을 불법 모금한 사건, 안기부 예산을 총선 자금으로 유용한 사건, 아들 병역면제 은폐 의혹, 호화빌라 의혹, 최규선씨 돈 20만불 수수 의혹 등 이 후보의 5대 의혹은 반드시 철저히 규명돼야 한다.
▼국민의 정부 승계
몇 가지 잘못이 있다고 국민의 정부가 이룩한 성과마저 외면 당해서는 안된다. 우리당은 국민의 정부가 시행해 온 성과는 계승하고 잘못은 과감히 시정해 나가겠다.
▼새 정치 패러다임
다수당이 앞으로 국회 운영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한나라당이 인식을 바꿔야 한다. 선거제도와 투표제 등에서 새로운 방식을 도입하는 방안도 검토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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